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⑪-2. 한국 음악의 거장들, 세종과 세조, 성현의 음악 세계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⑪-2. 한국 음악의 거장들, 세종과 세조, 성현의 음악 세계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8.1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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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2. 한국 음악의 거장들, 세종과 세조, 성현의 음악 세계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교육사랑신문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열한 번째 주제는 ‘뮤지션(musician)’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는 어떤 위대한 음악가가 있었고, 음악 예술은 어떻게 발전했는지 학생기자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편집자 주>

우리 음악의 시원을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벽화 속이다. 북한의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동에서 발견된 '덕흥리 고분 벽화'에는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음악의 시원을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벽화 속이다. 북한의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동에서 발견된 '덕흥리 고분 벽화'에는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음악은 시간예술이다. 무용수의 춤과 문인의 글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되고 전개되기 때문이다.

원시 음악은 시간을 따라 구전(口傳)됐다. 유행가처럼 입에서 입으로 흘러 다녔다. 오스트리아의 음악비평가 한슬리크는 “음악은 울려 퍼지면서 운동한다”고 했다. 소리의 순수한 예술성을 찬양한 것이다.

하지만 음악은 자율적인 소리의 예술에 그치지 않는다. 태생부터 그랬다. 원시시대에는 주술이나 노동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시대를 거치면서 종교와 윤리적인 교화의 힘을 얻었고, 관혼상제 등의 행사에 빼놓을 수 없는 지위를 갖게 됐다.

왕실에서 선대 왕의 제사를 지낼 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음악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세계 음악사에서 제례음악(祭禮音樂)은 한국, ‘조선’에서 한 획을 그었다. 바로 ‘종묘제례악’이다.

조선의 종묘제례악은 관악기와 현악기, 타악기를 두루 갖춘 왕실의 오케스트라였다. 서양의 제례악이 17세기 바로크 음악 시대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섰다. 유네스코는 지난 2001년 5월 18일 종묘제례와 함께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하며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했다.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악기연주와 노래, 춤을 함께 아울러 종묘제례악이라고 부른다. 종묘제례악은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으로 구성됐는데 이 곡들을 처음 만든 사람은 세종이고, 이 곡들을 종묘제례악으로 쓴 왕은 세조다.(사진=문화유산채널)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악기연주와 노래, 춤을 함께 아울러 종묘제례악이라고 부른다. 종묘제례악은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으로 구성됐는데 이 곡들을 처음 만든 사람은 세종이고, 이 곡들을 종묘제례악으로 쓴 왕은 세조다.(사진=문화유산채널)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이 틀을 잡고, 아들 세조가 완성했다.

세종은 천재 음악가였다. 박연과 함께 아악을 정비했고, 온갖 악기의 음을 조율했다. 수많은 향악을 작사·작곡했고, 이를 기록해 후세에 전할 음악기보법인 ‘정간보(井間譜)’까지 창안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했던 ‘정대업’과 ‘보태평’, ‘여민락’이다.

세종은 나라의 공식 음악으로 ‘아악’을 지정했지만 우리말 가사를 아악의 곡조에 얹는 것에는 부조화를 느꼈다. 특히 종묘 제사를 아악으로 지내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세종 12년 9월)”라며 조정에 화두를 던졌다. 탄탄한 음악 지식에 기반한 이론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세종의 물음은 30여 년 뒤 세조가 답을 낸다. “지금부터 정대업과 보태평을 종묘제례악으로 쓰도록 하라.” 1464년 세조 10년의 일이다. 세조는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어서는 아악을 듣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아버지의 고뇌를 잊지 않았다. 아버지 세종이 만들고, 아들 세조가 완성한 종묘제례악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종묘제례는 최고 존엄이다. 종묘 제사에 사용하던 아악에 고려의 향악을 변주해 만든 곡을 끼워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세조 역시 뛰어난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세조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세종실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한밤중에 어디선가 들려온 휘파람 소리를 듣고 ‘청협종’(淸夾鍾·편종의 중간 정도의 음계)이라며 음높이를 맞췄다는 절대음감 이야기나 피리를 부니 종친들이 모두 감탄했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 춤을 추더라는 기록도 있다. 아버지 세종은 대놓고 “악(樂)을 아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대군(세조가 수양대군이 되기 전의 이름) 뿐이고, 이는 전무후무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결국 부자의 마음은 같았다. 바로 ‘치세지음(治世之音)’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이 편하고 즐거우면 정치가 조화를 이룰 것으로 믿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조선의 음악은 왕조의 안정과 국민의 화합이라는 큰 뜻이 담겨있다.

두 임금이 치세의 소리를 구현하려고 애를 썼다면 성현은 조선 최고의 음악이론가이자 음악칼럼니스트, 공연기획가다.

두 권의 책이 증명한다. 그가 지은 ‘악학궤범(樂學軌範)’은 당대 음악의 지도서요, 안내서다. 출간된 성종대를 전후한 음악과 오늘날의 음악을 비교할 수 있는 책이며 백제 노래인 ‘정읍(井邑)’과 고려가요 ‘동동(動動)’의 완전한 한글 가사를 전하는 유일한 문헌이다.

또 무용, 복식, 음악과 공연에 쓰이는 소품과 소도구를 삽화와 함께 설명하는 등 관련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고, 한국 음악과 한국어문학 연구자들에게 필독서로 꼽힌다.

성현이 유자광 등과 함께 지은 '악학궤범'은 성종24년에 완성된 책으로 음악의 원리, 악기의 모습과 사용법, 무용 절차 등이 자세히 적어 놓은 우리 음악의 기준서다. 사진은 악학궤범 속 거문고와 태평소를 다룬 내용이다.
성현이 유자광 등과 함께 지은 '악학궤범'은 성종24년에 완성된 책으로 음악의 원리, 악기의 모습과 사용법, 무용 절차 등이 자세히 적어 놓은 우리 음악의 기준서다. 사진은 악학궤범 속 거문고와 태평소를 다룬 내용이다.

다른 책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인물, 역사, 문학, 제도, 풍속, 설화 등 조선 전기의 온갖 기록을 담은 책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조선 전기 문명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수 많은 음악가의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다.

송전수, 도선길, 김신번, 이반, 김자려, 김복, 정옥경, 상림춘, 황귀존, 김복산 등 당비파, 거문고, 가야금 등에 능했던 전문 연주자들의 이름과 에피소드를 적어 놓았다. 당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엄격했지만 음악을 ‘손끝에서 나오는 재주’가 아닌 ‘능력’으로 인정한 성현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는 고려부터 조선 성종대까지의 문물과 제도, 문화, 역사, 지리, 학문 등 풍속과 생활,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10권에 담았다. 조선 전기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성현의 ‘용재총화’는 고려부터 조선 성종대까지의 문물과 제도, 문화, 역사, 지리, 학문 등 풍속과 생활,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10권에 담았다. 조선 전기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물론 음악은 양반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조선 사회는 누구나 음악을 즐겼다.

신분이 낮았던 서민들은 꽹과리, 장구, 북, 징, 나발, 태평소, 소고 등 쉽게 구할 수 있는 악기를 연주하며 풍물놀이를 즐겼다. 농사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단합과 풍년을 기원하는데 음악은 절대적인 요소였다.

풍물놀이는 일제강점기 때 농촌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금지됐고, 1920년 조선을 식량공급기지로 만들려는 ‘산미 증식 계획’ 이후 두레굿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다. 오늘날에는 농악과 사물놀이로 대중화됐다. 지난 1978년 창단한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사물놀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다양한 장르와 결합한 공연으로 우리 음악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풍물놀이는 오늘날 사물놀이로 불리는 농악이다. 공동체의식에서 출발해 농사일의 피로를 풀고 풍년을 기원했던 농악은 오늘날 제사의 기능은 축소됐지만 사물놀이를 통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민중음악으로 자리매김했다.(사진=문화유산채널)
풍물놀이는 오늘날 사물놀이로 불리는 농악이다. 공동체의식에서 출발해 농사일의 피로를 풀고 풍년을 기원했던 농악은 오늘날 제사의 기능은 축소됐지만 사물놀이를 통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민중음악으로 자리매김했다.(사진=문화유산채널)

서민들이 즐겼던 음악에는 ‘판소리’도 빠질 수 없다. 창극이나 창악극으로 분류되는 판소리는 넓은 마당만 있으면 어디서든 공연이 가능했던 1인 오페라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북치는 사람)가 음악적 이야기를 엮어가며 연행하는 장르다. 소리꾼은 장단에 맞춰 창(唱·노래)을 했고, 여러 가지 시늉과 춤 등의 발림(몸동작)을 했고, 음률 없는 이야기(아니리)를 했다. 고수는 ‘좋지’, ‘얼씨구’ 등의 추임새로 흥을 돋웠다.

판소리는 한때 12마당이었지만 현재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등 5마당만 남았다. 서민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희노애락을 표현한 판소리는 지난 2007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선정됐다.

위로는 종묘제례악에서 아래는 판소리까지 한국의 음악은 빛나는 세계의 유산인 셈이다.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평양감사부임도' 중 명창 모흥갑의 판소리 장면.(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평양감사부임도' 중 명창 모흥갑의 판소리 장면.(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