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②도공, 흙과 불을 다루는 천년의 예술가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②도공, 흙과 불을 다루는 천년의 예술가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6.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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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도공, 흙과 불을 다루는 천년의 예술가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교육사랑신문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도공(陶工)’입니다. 도자공예는 당대의 미학과 민족성을 반영하고, 흙과 불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문화가 함축된 예술입니다. 우리 역사 속 도공들은 어떤 인물들이었을지, 그들의 파란만장하고, 찬란한 이야기를 학생기자들과 나눠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도공의 사전적 의미는 '옹기장이'다. 옹기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한국에서 도공은 오랜기간 동안 존경받는 직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고려 후기 직업에 따른 사회계급이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되면서 귀천 역시 선비·농민·공장(工匠)·상인 등의 순으로 굳어졌다. 중국에서 건너온 유교적 신분 질서였다. 이러한 신분차별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됐고,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야 철옹성 같던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흙과 불을 다루는 예술가, 도공의 손. 사진=경기도 광주시 제공
흙과 불을 다루는 예술가, 도공의 손. 사진=경기도 광주시 제공

하지만 도공에 대한 세계의 시각은 달랐다. 같은 시대 바다 반대편 영국의 시인이자 예술비평가인 허버트 리드(Herbert Read·1893~1968)는 "도자(陶磁) 만큼 한 나라의 문화와 기술의 척도를 제공해 주는 예술 장르는 없다"고 했다. 동양문화에 대한 찬사와 감동이 아니더라도 산업적인 가치를 간파한 일갈이다.

굳이 멀리 바라볼 필요도 없다.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일찌감치 도공의 가치에 눈을 떴다. '임진왜란'이 증거다.

흔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불리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의 조일전쟁을 세계 전쟁사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고 말한다. 선진 문물을 약탈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17세기 초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세계에서 조선과 중국 두 나라만 가진 첨단 기술이었다.

조선 백자의 상품 가치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고, 군대 안에 공예부를 조직해 도공은 물론 집집마다 흔했던 요강이나 개밥그릇까지 쓸어 갔다. 유사 이래 문화와 경제에서 일본을 압도했던 조선은 도자기 제조 원천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되면서 경제력이 역전됐다. 임진왜란을 '도자 전쟁(燒物戰爭·야키모노 센소)'으로 부르는 까닭이다.

역설적이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의 지원 아래 마음껏 예술성을 펼쳤다. 다이묘들은 "성 하나와 조선 다완(찻잔)과 바꾼다"고 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아끼지 않았다. 기술을 얕잡아 본 조선에서 천대받던 조선 도공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도자기를 빚으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큐슈지역을 중심으로 저마다의 혼을 담은 자기를 빚었고, 어느새 일본은 사가현의 나베시마에서 가라츠야키(唐津燒)와 이마리야키(伊万里燒)를 탄생시키고, 오이타현과 후쿠오카현에서 각각 다카토리야키(高取燒)와 아가노야키(上野燒)를, 가고시마현의 시마즈에서는 사츠마야키(薩摩燒)를, 나가사키현의 오오무라와 마츠우라에서는 각각 하사미야키(波佐見燒)과 나카노야키(中野燒)를, 야마구치현의 모우리에서는 하기야키(萩燒) 등의 브랜드를 만들어 낸다. 야끼(燒)는 '가마'를 뜻한다.

이 때 일본 도자사에 혁명적인 과업을 이룩한 이삼평(李參平)이란 조선인이 등장한다. 바로 일본 자기의 출발점을 알리는 '아리타야끼(有田燒)'다. 일본에서 도조(陶祖·도자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삼평은 사가현 아리타에서 백자의 원료를 발견했고, 처음으로 'Made in Japan 백자'를 완성했다. 거친 도기에서 표면이 매끈한 자기로의 전환은 획기적인 대사건이었다. 이삼평에 의해 막을 연 일본 자기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다. 임진왜란 이후 에도(江戶)시대 1653년부터 100년 동안 나가사키항을 통해 서양에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는 100만점을 넘었다.

일본 아리타 석장신사에 있는 이삼평 조각상(왼쪽)과 도산신사의 도조 이삼평 비. 사진=일본 사가현 제공.
일본 아리타 석장신사에 있는 이삼평 조각상(왼쪽)과 도산신사의 도조 이삼평 비. 사진=일본 사가현 제공.

어느새 일본은 세계 무대에서 '도자기의 나라'가 됐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전까지 거둔 해외 무역이익의 90%가 도자기로 번 돈이었다. 메이지 유신과 일제강점기를 낳은 종잣돈이 도자기 수출에서 나온 셈이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이삼평이 나고 자란 곳은 충남 공주다. 지난 1990년 한일 양국의 우호 친선을 바라는 일본 사가현의 아리타쵸 주민들이 모금을 통해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산33-1번지에 도조 이삼평공 기념비를 세웠다. 현재는 공주시 학봉리 이삼평공원에 비석이 옮겨졌다. 일본 아리타의 도산(陶山)신사는 일왕과 다이묘와 함께 이삼평을 모시고 추앙하고 있다.

일본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도공 일가를 이룬 이는 이삼평 뿐 만이 아니다. 수백 명의 도공을 이끌었던 여성 도공 백파선(百婆仙)도 있고, 유명한 오이타의 다카토리(高取) 도자기를 만든 팔산(八山)이나, 구마모토의 고다(高田) 도자기와 후쿠오카의 아가노(上野) 도자기를 창시한 존해(尊楷) 등도 이름을 날린 조선 도공이다.

앞서 언급한 가고시마현의 사츠마야키(薩摩燒)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번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심당길과 80여명의 조선인이 만든 가마터다. 1603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식 가마를 짓고, 조선 분청도자기를 본뜬 흑색도자기 '구로몬'을 탄생시켰다. 12대손인 심수관이 국제품평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심수관 가문은 지난 1998년 1대 도공이 일본에 끌려간 지 400년 되는 해를 기념해 전북 남원에서 ‘심수관 400년 귀향제’를 열었다. 이때 이들은 '남원의 불(火)'을 가지고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이에 대해 심수관 가문은 "초대 심당길 일행이 일본에 끌려올 때 가지고 온 것은 흙과 유약 기술이었다.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불(火) 만 일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히바카리(火計り·오로지 불만 빌렸을 뿐이라는 의미)라고 부른다. 하지만 4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거꾸로 일본의 흙과 유약과 일본 기술에 한국의 불로 도자기를 구워보자고 해서 한국의 불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에는 '무명 도공의 비(碑)'가 서 있다. 지난 1977년 도공들의 높은 도예의 경지를 기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비다. 평생 흙으로 그릇을 빚고, 깊은 산의 나무로 가마에 불을 지폈던 이름 모를 도공들. 도자기에 혼과 넋을 불어 넣었을 뿐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았던 위대한 예술가들을 위해 비문의 글을 옮긴다.

"후손들에게 뛰어난 문화유산을 남겨주고, 온 곳으로 돌아간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넋들이여. 흠모하나니 위로받을 지어다."

경기도 광주의 무명 도공의 비.
경기도 광주의 무명 도공의 비.

 

도자기, 시대 정신을 담아내는 예술이 되다.

흔히 '도자기(陶磁器)'라는 명칭은 편의상 부르는 이름이다. 도기와 자기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일단 도기는 흙을 구어 만들며 점토 속의 산화알루미늄이 주체가 되지만 자기는 돌을 소성(燒成)하며 규산이 든 고령토라는 장석 계통이 흙이 주재료다. 투박한 느낌이 드는 도기와 달리 자기는 두드리면 금속성이 나며 표면이 보석 같은 광택이 난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 건 원시시대부터 이어졌지만 자기를 만든 건 중국이 최초다. 이미 3세기 무렵 질 좋은 자기를 만들어 썼다.

청자의 기원은 중국 은(殷)·주(周)·전국(戰國)시대 무렵까지 거슬러 오른다. 특히 중국 남부지방에서 발달해 삼국시대와 서진(西晉) 무렵에는 회녹색의 고월주요(古越州窯)라는 원시적인 청자가 저장성(浙江省)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당나라 시대는 청자의 질과 양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비색청자’로 불린 월주자기(越州磁器)는 수많은 시인 묵객의 칭송을 받았고, 헤이안시대 일본 귀족들도 비색청자를 구하려고 안달을 했다. 송대(宋代)에는 당대의 비색청자의 흐름을 이어 더 많은 곳에서 청자를 빚었다. 남송은 수도 항저우 근교에 관영 가마를 설치해 보급형 청자를 구워냈으며 해외에 활발히 수출했다.

사진 왼쪽부터 당 월주요 비색청자횡파형차호, 남송 청자양이침형병.
사진 왼쪽부터 당 월주요 비색청자횡파형차호, 남송 청자양이침형병.

중국의 청자기술은 통일신라와 고려에 전해지면서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한다. 바로 ‘고려청자’의 출현이다.

한국에서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서해안과 남해안 각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지도층을 중심으로 중국 청자를 수입했고, 청자의 뛰어난 아름다움과 실용성, 산업성에 눈을 떴다.

청자를 자체 생산하려는 집념은 9세기 서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절강성 월주요의 기술진을 적극적으로 수입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게 된다. 고려 초기(10∼11세기)에는 전남 강진과 부안에서 독자적인 청자를 만들어 냈고, 12세기에는 중국의 비색청자(翡色靑瓷)를 압도하는 청자를 탄생시켰다.

고려는 청자의 색깔뿐 만이 아니라 다른 색의 흙을 이용해 무늬를 넣은 창조적인 기법을 고안해 냈다. 상감기법을 이용한 고려 상감청자는 당대 최고 도자기술의 집합체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청자참외모양병(국보 제94호), 청자투각칠보무늬향로(국보 제95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전자(국보 제133호)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청자참외모양병(국보 제94호), 청자투각칠보무늬향로(국보 제95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전자(국보 제133호)

상감청자의 제작공정은 크게 6단계다. 첫째 흙을 반죽해 형태를 빚고, 둘째 약간 말린 다음 무늬를 넣는다. 무늬는 양각, 음각, 투각, 상감 등 용도나 표현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셋째 초벌구이 전에 모양과 무늬를 완성한 뒤 그늘에서 천천히 말린다. 넷째 가마에서 처음 굽는 초벌구이를 한다. 이때 비교적 약한 온도인 약 600~800°c 정도에서 굽는다. 다섯째 유약을 바른다. 유약은 도자기의 바탕에 액체나 기체가 스며드는 것을 막고, 광택을 내는 잿물이다. 청자의 경우, 일정 비율로 유약에 철가루를 넣는데 철 성분이 열에 작용해 푸른 청색을 만드는 과학적 비밀이 숨어 있다. 여섯째는 마침구이다. 유약을 바른 도자기를 약 1200~1300°c 고온에서 한 번 더 굽는 작업이다.

고려청자는 13세기에 금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 넣는 화금청자로 발전했고, 산화구리를 안료로 써서 붉은색 문양을 담아낸 진사청자 등으로 변모해 갔다.

한국의 도예전통은 이후 조선 초기 분청사기를 거쳐 인류 도자의 정점으로 불리는 ‘조선백자’로 이어진다.

분청사기는 무늬가 간결하고, 서민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분청은 회색이나 회흑색의 태토 위에 백토로 표면을 마무리한 도자기다. 일제강점기 때 고유섭 선생이 처음으로 ‘분장회청사기’라고 이름 붙이면서 분청사기로 통용됐다. 백토를 이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무늬를 그렸는데 초기에는 꽃과 나비 모양을 도장처럼 찍는 인화기법이나 상감기법으로 그려 넣었다면 후기에는 긁어내는 박지기법이나 풀을 엮어 만든 붓을 이용한 귀얄기법, 철 안료를 쓴 철화기법 등으로 다양해졌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에 비해 덜 유명하지만 조선 초기 진상품 자기였고,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됐을 정도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조선백자’는 선비문화의 정수다. 백색의 점토로 그릇을 만들고, 유약을 입혀 구워내는데 백자의 색깔은 유약의 색과 안료의 성분, 기법 등에 따라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진사백자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 순백자는 점토와 유약 외에 다른 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백색자기다.

조선백자는 경기도 광주, 경북 고령, 상주 지역에서 생산됐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가마가 파괴되고,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면서 도자기술이 쇠퇴했는데 다행히 광주관요(官窯)가 유일하게 남게 돼 조선백자를 중심으로 하는 큰 줄기를 이뤄냈다.

사진 왼쪽부터 미국 경매시장에서 33억원에 낙찰된 분청사기편호와 조선백자 달항아리.
사진 왼쪽부터 미국 경매시장에서 33억원에 낙찰된 분청사기편호와 조선백자 달항아리.

순백의 자기는 유럽에서는 ‘하얀 금’으로 불렸다. 유럽 각국은 17세기 독일의 마이센 도자기가 탄생할 때까지 백자 생산에 거듭 실패했다. 마이센 도자기는 세계 3대 도자기로 꼽히는 덴마크 왕실의 ‘로열 코펜하겐’과 영국 '로열 웨지우드' 등으로 이어진다.

중국에서 시작된 ‘자기 제조’의 최첨단 기술이 한국에서 꽃을 피운 뒤 일본으로 전해졌고, 다시 유럽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이유가 있다. 유럽은 르네상스 이후 발달된 인문과학정신과 회화미술을 바탕으로 도자기에 패션을 입혔다. 프랑스의 세브르 자기는 로열 블루와 마늘즙으로 금을 착색하는 금채자기로 도자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오늘날 세계 명품 도자기 시장의 90%를 유럽이 석권하게된 배경이다.

한 나라의 생활문화를 재료 미학이나 심미적인 가치까지 고려할 때 공예문화는 그 나라 문화의 자존심이다. 특히 도예는 늘 중심에 있다.

오늘날 도예는 고유한 도자기 기법과 재료를 원칙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공예 산업으로 확장하고 있다. 도자를 가지고 공작하는 기술(도자공예)은 도자예술로 불릴 정도다. 도자기 제작형태 역시 전통도자, 산업도자, 공예도자, 환경도자 등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이재삼 제3도예연구소장은 책 ‘도벽@환경도예’에서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도예의 공예성 회복 움직임은 산업디자인에 의해 대체된 도구성에 대한 대응이며 하나의 문화적 기제로서, 또 실용적 공예미의 사회적 소통으로서, 다가올 변혁의 시대에도 더욱 새로운 역할이 기대된다”고 썼다. 도벽(陶壁)은 그림이 든 도자기 타일벽을 말한다.

오늘날 도자기는 시대 정신을 담아내는 예술은 물론 부가가치가 큰 산업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 1600년대 중반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던 시기 중국은 도자기 수출을 중단한다. 바로 그때, 일본 도자기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기회를 잡는다. 일본은 도자기를 통해 유럽과의 무역에 박차를 가했고, 도자기로 번 돈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다.

▲TIP. 자기의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박물관에 가면 고려청자 이름이 길고 복잡해서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약간의 원칙만 이해하면 쉽게 외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청자(푸른도자기), 상감(상감기법), 운학문(구름과 학의 무늬), 매병(아래보다 위로 갈수록 전제 모양이 커지는데 입구는 매우 좁은 형태의 도자기)라는 4단계를 이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즉, 색깔-기법-무늬-용도의 순서다. 고려청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