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⑦-2. 꼭 알아둬야 할 우리 역사 속 상업 시스템 총정리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⑦-2. 꼭 알아둬야 할 우리 역사 속 상업 시스템 총정리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7.2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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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2. 꼭 알아둬야 할 우리 역사 속 상업 시스템 총정리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교육사랑신문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일곱 번째 주제는 상인(商人)입니다. 우리 역사 속 상인의 모습과 상업을 경제의 중심으로 바라본 조선의 중상주의 사상가들을 학생기자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편집자 주>

한국의 역사는 상업활동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농업을 근본으로 하는 신분질서도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들의 활동에 족쇄가 됐다. 사진은 1910년대 남대문시장의 모습과 방물장수(오른쪽), 유기전의 모습(왼쪽)이다.
한국의 역사는 상업활동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농업을 근본으로 하는 신분질서도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들의 활동에 족쇄가 됐다. 사진은 1910년대 남대문시장의 모습과 방물장수(오른쪽), 유기전의 모습(왼쪽)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는 행위(致富)는 오랫동안 치부(恥部)로 여겨졌다. 백성을 나누던 네 가지 계급인 선비, 농부, 공장(工匠), 상인의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도 상인은 가장 밑바닥에 위치했다. 상업과 이윤추구는 죄 아닌 죄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업 활동은 수렵채집사회가 농경사회로 전환되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발생했고, 교환이나 판매같은 기초적인 상거래 형태가 발생했다.

우리 역사 속에서는 위만조선이 중국 한나라와 전한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통해 나라를 유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때에는 벽란도를 통해 아리비아상인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국제무대에 고려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코리아(Korea)’의 탄생이다.

고려 시대의 활발한 무역 활동은 속요를 모은 ‘악장가사’에 실린 ‘쌍화점(雙花店)’의 노랫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쌍화점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더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라”는 가사 속에서 회회(回回)아비는 쌍거풀이 짙은 아라비아 상인이다.

몽골의 침입 탓에 다문화 성격이 짙었던 고려 시대에도 상인은 최하층의 계급이었다. 이는 봉건질서가 더욱 강화된 조선까지 줄곧 이어졌다. 조선 초기 상인은 지배층을 위한 어용적 존재에 불과했고, 지배층이 요구하는 재화의 수급에 맞춰 상행위가 규제됐다.

조선 후기에 신분 질서의 동요가 부분적으로 나타났지만 상업은 본질적으로 관부(官府)와 연계되거나 각종 사회적 제약으로 자유로운 상인층을 공인받지 못했다.

국가가 신분 제도라는 시스템으로 시장경제에 수많은 억압을 행사했지만 부(富)에 대한 백성들의 욕망까지 꺾지는 못했다. 농업이 근본인 조선에서도 상업을 통한 국부론(國富論)을 주장한 학자들이 나왔고, 상업발달을 이끈 거상(巨商)들이 출현했다.

조선 후기 정조가 추진한 ‘신해통공(1791년)’은 당대의 지식인과 백성들의 염원이 담긴 시장경제정책의 쾌거다. 정조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들의 독점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난전을 허용했다.

시전, 난전, 육의전은 모두 시장의 이름이다. ‘시전(市廛)’은 상설점포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도시계획과 함께 시장 건설을 추진했다. 간선도로 양측에 상설점포를 짓고, 상인을 불러 모아 경제적 수요를 창출했다. 장소를 빌려주는 대가로 세금을 거둬들였고, 왕실이나 지배계층이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난전(亂廛)’은 무허가 노점상이다.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신분 질서가 크게 흔들렸고, 농촌을 떠나온 백성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오늘날의 서소문이나 종로4가 부근에 관청의 허가 없이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상행위의 특권을 가지지 않은 자가 상거래를 통해 봉건적 상업구조를 어지럽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난전’이다

‘육의전(六矣廛)’은 나라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던 ‘6종류의 주요 점포’다. 면포전(무명), 면주전(명주), 저포전(모시), 선전(비단), 지전(종이), 내외어물전(생선) 등의 품목을 독점적으로 취급했던 시전상인들이다.

육의전은 한양의 가장 번화가인 돈의문(서대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을 가로지르는 큰 대로인 운종가에 조성됐다. 난전은 나라의 허가를 얻지 못한 탓에 한양 도성 10리 밖에 형성됐다. 숭례문(남대문) 밖의 ‘칠패’와 동대문 밖의 ‘이현’ 등에 대규모 난전이 생겼고, 오늘날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의 원형이다.

조선은 수도 한양의 중심지에 상설시장인 시전을 설치했다. 사람이 구름처럼 몰린다는 운종가(사진 왼쪽)에는 핵심 상권에 육의전이 위치했다. 허가받지 못한 상인들의 점포인 난전은 도성 밖에 설치됐으며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밖에 있던 난전이 오늘날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의 원형이다.
조선은 수도 한양의 중심지에 상설시장인 시전을 설치했다. 사람이 구름처럼 몰린다는 운종가(사진 왼쪽)에는 핵심 상권에 육의전이 위치했다. 허가받지 못한 상인들의 점포인 난전은 도성 밖에 설치됐으며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밖에 있던 난전이 오늘날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의 원형이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은 난전과의 경쟁에서 기득권을 뺏기지 않고자 했던 시전상인들의 카르텔이다. 정부도 이를 통해 세금을 내는 상인을 육성하고자 했지만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던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고, 백성들의 삶도 궁핍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금난전권을 폐지한다는 것은 시전상인들의 독점적인 지위를 풀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경제개혁인 동시에 조선 사회를 지배한 봉건적 상업질서의 붕괴를 의미한다.

조선 중기 이후 상업자본이 축적되면서 자본가 세력인 ‘거상(巨商)’이 등장한다. 한양의 경강상인(경상), 개성상인(송상), 동래상인(내상), 의주상인(만상), 평양상인(유상) 등 5개의 상인집단이다.

조선 중기 이후 상업자본이 축적되면서 자본가 세력인 거상이 등장한다. 개성상인의 독특한 부기는 세계 최초의 복식부기이며 보부상은 찾아가는 세일즈맨의 표상이다.
조선 중기 이후 상업자본이 축적되면서 자본가 세력인 거상이 등장한다. 개성상인의 독특한 부기는 세계 최초의 복식부기이며 보부상은 찾아가는 세일즈맨의 표상이다.

경강상인들은 한강을 이용한 해운과 선박제조 기술을 통해 미곡·소금·어물 등을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판매하며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뚝섬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한강 유역에 많은 나루터가 생겼고, 지방민의 한양 유입으로 수많은 신촌(新村)이 건설됐다. 한양의 행정구역도 4대문 밖으로 확대됐다.

고려시대부터 활동했던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두고 인삼을 직접 재배·판매했다. 의주와 동래상인을 매개로 청·일간의 중개무역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독특한 ‘사개치부법’은 이탈리아 메디치가문보다 200년 앞선 인류 최초의 복식부기법이다.

의주 만상 임상옥은 인삼 무역으로 조선 최고의 거상(巨商)이 된 인물이다. 그는 인삼이 땅의 모든 기운을 흡수해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처럼 재물로 빈민을 구제하고 자선사업을 펼쳐 올바른 상인의 길(商道)을 보여줬다. 그의 이야기는 소설가 최인호의 작품인 ‘상도’와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됐다.

조선의 거상 임상옥과 김만덕은 무역과 상거래로 큰 부를 축적했지만 노블레스 오 블리주를 실천한 상도(商道)로 더욱 추앙받았다.
조선의 거상 임상옥과 김만덕은 무역과 상거래로 큰 부를 축적했지만 노블레스 오 블리주를 실천한 상도(商道)로 더욱 추앙받았다.

조선의 상인 중에는 임상옥처럼 자신만의 블루오션 전략으로 큰 성공을 일군 사람이 적지 않다.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이었던 이지함이 신분의 한계를 넘어섰다면 제주 거상 김만덕은 기생 출신 여성이라는 장벽을 허물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위었지만 끊임없는 도전으로 러시아와 우리나라를 오가며 조선 최고의 선박왕이 된 최봉준도 있고, 은행원이었지만 고물을 사고파는 넝마주이로 변신해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동아백화점)을 세운 최남도 시대를 풍미한 거상이다.

이밖에 보부상단의 우두머리로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도와 조선 경제를 이끌었던 백달원, 최초의 해운회사를 세운 김익승, 약장수로 전국을 휩쓴 이경봉, 원산의 소금왕 김두원 등도 훌륭한 상인이다.

한국 최초의 백화점을 세운 최남과 동아백화점의 모습(사진왼쪽)과 소화제 '청심보명단'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은 이경봉의 한국 최초의 의약품광고. 광고는 약이 위장으로 들어가자 남아있던 음식물들이 도망가는 그림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국 최초의 백화점을 세운 최남과 동아백화점의 모습(사진왼쪽)과 소화제 '청심보명단'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은 이경봉의 한국 최초의 의약품광고. 광고는 약이 위장으로 들어가자 남아있던 음식물들이 도망가는 그림으로 인기를 끌었다.

상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서비스산업과 화폐경제를 일으킨다. 보부상 활동과 유통망의 확대로 시장은 전국으로 커졌고, 주막과 객주, 여각 등 다양한 시설이 활기를 띠게 된다.

‘주막’은 술과 밥,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시설이며 ‘객주’는 외지에서 온 상인에게 임시거처를 제공하면서 물건을 맡아 팔아주거나 흥정을 붙이는 중개 업소다. 객주는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숙박업을 주로 하면서 직거래장터를 여는 ‘보행객주’, 금융업을 담당한 ‘환전객주’, 대형마트처럼 생필품을 취급하는 ‘무시객주’ 등이 있었다. ‘여각’은 마방을 갖춘 대규모 객주로 오늘날 물류센터의 역할을 했다.

한국의 화폐 중 현존 최고(最古)는 고려시대 건원중보다. 고려는 무문전, 활구(은병), 해동통보, 동국통보, 삼한통보 등의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켰다. 고려말 조선초에는 ‘저화’라는 지폐도 등장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통보와 상평통보가 있고,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발행한 당백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