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⑧-2. 조선의 궁중요리사는 남자였다?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⑧-2. 조선의 궁중요리사는 남자였다?
  • 교육사랑신문
  • 승인 2018.07.2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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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2. 조선의 궁중요리사는 남자였다?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교육사랑신문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여덟 번째 주제는 ‘요리사’입니다. <편집자 주>

선조가 대신들의 부모를 위해 연 경수연을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의 모습.
선조가 대신들의 부모를 위해 연 경수연을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의 모습.

1605년, 조선 국왕 선조가 대신들의 부모를 위해 경수연을 마련한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는 이때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놀라운 장면이 있다. 음식을 만드는 조찬소에 남자들이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마솥을 걸고, 칼을 들고, 재료를 나르는 사람은 여자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왕의 부엌인 수라간은 여성들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림은 분명 '남자 요리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철저한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남자가 부엌일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대표 셰프인 숙수(熟手)는 모두 남자였다.

사실 조선시대의 궁중 요리사는 남자였다. 여자라는 고정관념이 생긴 것은 고종황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폐위된 이후다. 황제가 폐위되고, 내시들과 왕의 요리사인 숙수들이 모두 해고되면서 음식을 만드는 자리를 어쩔 수 없이 상궁들이 대체하게 됐다. 이후 조선이 일제에 의해 망하자 마지막 수라상궁이 궁중 음식을 민간에 전수했는데 이때부터 왕의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이 여성의 공간이었다는 왜곡된 정보가 퍼지게됐다.

'선묘제재경수연도' 속의 조찬소에는 남자 요리사들이 눈에 띈다. 솥을 걸고, 칼을 휘두르고, 재료를 나르는 사람은 모두 남자다.
'선묘제재경수연도' 속의 조찬소에는 남자 요리사들이 눈에 띈다. 솥을 걸고, 칼을 휘두르고, 재료를 나르는 사람은 모두 남자다.

이런 사실은 세종실록에도 자세하게 나와 있다. 궁궐에서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은 임금이 머무는 대전을 비롯해 중궁전, 동궁전 등 궁궐의 여러 곳이 있었고, 수라간에서 일하는 인원이 약 400명에 달했다. 이 중 별사옹(수라간 하급관리) 14명과 탕수증색(물 끓이는 담당) 10명 등을 포함해 남자가 376명, 여자가 12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음식의 재료를 다루는 것이 거친 일이고, 각종 조리도구가 무겁다는 점을 고려할때 남자 요리사가 더 많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수라간 나인들은 차려진 음식을 나르거나 뒤처리하는 일을 맡았고, 상궁은 나인을 관리하는 게 임무였다.

재미난 것은 고종황제의 마지막 숙수였던 안순환(1871∼1942)에 대한 일화다. 안순환은 수라간에서 궁중음식을 책임지는 궁내부 전선사의 총책임자인 '장선'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궁에서 해고되자 궁중 남자요리사인 대령숙수들을 대거 모아 1909년 조선 최초의 궁중 요리집인 '명월관'을 연다. 조선식 레스토랑은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12첩 반상 '왕의 수라상'을 먹는다는 사실은 대중을 열광시켰다. 12첩 반상은 오직 왕이나 왕비만을 위해 차려지고 민간에서는 찬수에 따라 9첩 반상이나 7첩 반상 또는 5첩, 3첩 반상을 차렸기 때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숙수였던 안순환은 1909년 조선 최초의 요리집인 명월관을 연다. 왕의 수라상인 12첩 반상을 접한 대중은 조선식 레스토랑에 열광했다.(사진은 명월관과 안순환. 문화유산채널 영상 캡처)
조선의 마지막 숙수였던 안순환은 1909년 조선 최초의 요리집인 명월관을 연다. 왕의 수라상인 12첩 반상을 접한 대중은 조선식 레스토랑에 열광했다.(사진은 명월관과 안순환. 문화유산채널 영상 캡처)

안순환은 고종이 즐겨 먹던 냉면을 선보여 히트 상품으로 만들었다. 명월관은 1918년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당대 내로라하는 인사들과 부호들의 사교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명월관이 불탄 뒤에는 매국노 이완용의 집을 사들여 '태화관'이라는 분점을 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이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바로 그 장소다.

명월관의 탄생 이후 한국에는 수많은 조선요리집이 생겨났다. 근대적인 조선요리집의 등장은 '조선음식'이라는 표준화된 이미지까지 만들어 낸다. 대중들은 자신의 집에서 소비하던 음식과 다른 차원의 조선요리집 음식을 조선음식의 대표로 여기게 됐고, 지금까지도 '한정식'이라는 이름으로 대표성을 띠게 됐다.

궁중음식의 백미는 왕의 수라상이다. 조선시대 왕의 밥상은 12첩 반상이 기본 상차림이다. 왕조의 멸망과 함께 왕의 수라상은 조선요리집을 통해 서민에게 알려졌고 지금의 한정식으로 자리매김했다.
궁중음식의 백미는 왕의 수라상이다. 조선시대 왕의 밥상은 12첩 반상이 기본 상차림이다. 왕조의 멸망과 함께 왕의 수라상은 조선요리집을 통해 서민에게 알려졌고 지금의 한정식으로 자리매김했다.

궁중음식이 조선요리집을 거쳐 한정식으로 뿌리 내린 것처럼 우리네 음식에는 재미난 이력을 가진 메뉴가 많다.  설렁탕, 청국장, 탕평채 등이 대표적이다.

설렁탕의 유래는 '선농탕'이다. '선농단에서 먹는 국'이라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은 매년 경칩 이후 해일(亥日)에 선농단에서 '농사의 신' 선농씨를 기리며 풍년을 기원했다. 제사는 임금이 직접 주관했고, 여러 신하들과 밭을 가는 '친경례'를 했다. 이때 소와 돼지를 잡아 통째로 상에 올렸고, 제사가 끝난 뒤 문무백관과 백성들까지 모두 나눠 먹었는데 큰 솥에 국을 끓여 밥을 말아서 준 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 됐다는 이야기다. 선농제를 지내고 선농탕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는 뒷풀이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3년(1909년)에 일제에 의해 폐지된다.

청국장의 유래는 뜻밖에도 너무 왜곡돼 있다. '청나라에서 온 된장국'이라는 유래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포털사이트에서 청국장의 유래가 청국(淸國)이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 중기의 '산림경제'가 최초로 언급한 문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청국장은 단기 숙성해서 먹는 장이다. 보통 여섯 달 이상 걸리는 일반 된장국과 달리 2~3일이면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전국장'이라고 불렀다. 전쟁 중에도 급히 만들어 먹는 된장국이라는 의미다.

선농단 제사는 순종 융희 3년(1909년)을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폐지됐다. 선농단은 서울 동대문 근처에 약 4m의 돌로 만든 제단 만이 남아있다.(사진 왼쪽) 청국장은 청나라 된장이 아닌 고구려 시대부터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단기 숙성 장류인 '고려장'이나 '염시'의 종류다.
선농단 제사는 순종 융희 3년(1909년)을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폐지됐다. 선농단은 서울 동대문 근처에 약 4m의 돌로 만든 제단 만이 남아있다.(사진 왼쪽) 청국장은 청나라 된장이 아닌 고구려 시대부터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단기 숙성 장류인 '고려장'이나 '염시'의 종류다.

사실 우리 역사 속에서 단기 속성 장류를 부르는 이름은 '고려장', '염시', '시', '책성시' 등으로 다양하다. 고려장은 고구려가 부르던 이름이고, 염시와 시는 신라, 책성시는 발해가 부르던 청국장의 이름이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웅진도독부로 물자를 지원할 때 '길이 막혀 염시를 보낼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장과 책성시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절요'에도 나와있다. 그만큼 유래가 오래됐다는 이야기다.

청국장의 탄생은 기마민족과 밀접하다. 볏집으로 만든 주머니에 콩을 보관하는 것 자체가 유목민들의 풍습이기 때문이다. 말 안장에 있던 볏주머니 속의 콩이 말의 체온으로 숙성돼 청국장이 된 것이다. 콩의 생물학적 기원도 만주지역인 것을 미뤄볼 때 청국장의 유래는 우리 민족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청국장의 '청'은 더이상 청나라 '청(淸)'이 아니라 푸른곰팡이 '청(靑)'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탕평채는 의미있는 유래를 지닌 음식이다. 조선시대 궁중의 놀랍고도 슬픈 사연이 함께한다.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는 궁중의 가장 밑바닥 나인인 '무수리'를 엄마로 뒀다. 적장자 승계의 혈통을 중시했던 조선 사회에서 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정통성 시비도 따라다녔다. 그의 핸디캡은 줄기차게 당쟁의 소재가 됐고, 마침내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일까지 발생한다. 아들인 사도세자가 소론과 함께 자신의 자리를 넘본다는 오해 때문이었다. 영조가 뒤늦은 후회와 함께 조정 대신들에게 내놓은 음식이 '탕평채'다.

탕평채는 녹두묵의 푸르스름한 흰색과 볶은 고기의 붉은색, 미나리의 푸른색, 김의 검은색으로 이뤄진 음식이다. 조선시대 4개의 붕당으로 나뉜 서인, 남인, 동인, 북인을 대표하는 색이다. 붕당은 붕(朋)과 당(黨)의 합성어로 '붕'은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무리(벗)를 말하고, '당'은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다. 영조가 탕평채를 내놓을 때 집권세력이 서인이어서 흰색 청포묵이 주재료가 됐다.

영조는 성균관 정문에 탕평비를 세워 자신의 정치철학과 신념을 보여줬다. 탕평책을 위해 내놓은 음식이 바로 탕평채다.
영조는 성균관 정문에 탕평비를 세워 자신의 정치철학과 신념을 보여줬다. 탕평책을 위해 내놓은 음식이 바로 탕평채다.

'탕평'이란 이름은 '서경'에 나오는 '왕도탕탕 왕도평평(王道蕩蕩 王道平平)'에서 따온 구절이다. 탕평채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당파가 아닌 인물 위주로 국정을 이끌겠다는 영조의 의지를 담은 음식인 셈이다. 영조는 '탕평채'라는 음식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하사함으로써 숙종 대의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으로 이어졌던 붕당 간의 정치 보복과 숙청의 피바람을 끝내고, 당파싸움의 종식을 선언했다. 그의 탕평책은 손자인 정조까지 계승됐고, 정조가 죽은 뒤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한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문벌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탕평정치도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