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⑫의료인, 하얀 가운을 입은 '건강 지킴이'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⑫의료인, 하얀 가운을 입은 '건강 지킴이'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8.25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⑫의료인, 하얀 가운을 입은 '건강 지킴이'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교육사랑신문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열두 번째 주제는 '의료인(醫療人)'입니다. 의료인은 인간의 질병을 예방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간호하는 전문인력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는 어떤 의료기관과 의료인이 있었는지 학생기자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편집자 주>

의료인은 인간의 질병을 예방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간호하는 전문인력이다. (사진은 드라마 '하얀거탑' 수술 장면)
의료인은 인간의 질병을 예방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간호하는 전문인력이다. (사진은 드라마 '하얀거탑' 수술 장면)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만물의 이치다. 사람 사는 곳 어디든지 질병이 있었다. 역사 속 인류는 끊임없이 병을 극복하려고 힘썼다.

질병은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와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다. 전염병을 빼놓고 인류의 역사를 말하기 힘든 까닭이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에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염병 기록을 전한다. "백제 온조왕 4년(기원전 15년)에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생기고 역병(疫病)이 유행했다."

이 때문인지 백제는 이미 4세기 말에 약을 만드는 제약기술인을 보유했고, 의학교수인 의박사를 일본에 정기적으로 보내 의술을 전파할 정도로 의료 강국이었다. 백제 개로왕이 일본에 파견한 '덕래'는 일본 의술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414년 신라 의사 기무가 일본 왕의 병을 고쳐줬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5세기부터 7세기 초까지 백제와 고구려는 20여 명의 의사와 의술을 배운 승려들을 일본에 파견했다.

984년 일본의 단바 야스요리가 편찬한 '의심방(醫心方)'에는 백제와 신라의 의서인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과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 등의 의학 처방이 인용돼 있다. 삼국이 일본 고대의학의 뿌리임을 보여주는 문헌이다.

일본의 단바야스요리(丹波康賴)가 지은 '의심방'은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 등 우리나라의 의서들이 기록돼 있어 한국의학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일본의 단바야스요리(丹波康賴)가 지은 '의심방'은 '백제신집방', '신라법사방' 등 우리나라의 의서들이 기록돼 있어 한국의학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신라는 692년 의학교육 기관인 의학(醫學)을 설립했다. 체계적인 교육으로 의사를 배출했다. 왕실과 귀족들은 전문의료진을 통해 병을 치료했다.

하지만 일반 서민들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저 병을 피해 도망가거나 신에게 의지했다. 어느 나라든 민간 사회에서 최초의 의사가 대개 '샤먼'인 이유다. 이들은 무속과 진료를 결합한 '의무(醫巫)'로서 역할을 했다.

특히 8-9세기 신라에서는 약사여래불에 대한 신앙이 크게 유행했는데 당시 천연두가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쳐주는 신통력을 기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경주 백률사 약사여래불이나 분황사 약사여래불 등 많은 불상이 건립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의무'로서의 샤먼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두창과 마진 등의 전염병은 극존칭인 '마마'로 불렸고, 백성들은 마마신이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며 '배송(拜送)굿'을 했다.

국보 제28호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8세기 후반 전염병을 치료하려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중생을 치료하는 약사불은 많은 이들에게 기도의 대상이 됐다. 조선후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에는 평양식 마마배송굿 장면이 담겨있다.
국보 제28호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8세기 후반 전염병을 치료하려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중생을 치료하는 약사불은 많은 이들에게 기도의 대상이 됐다. 조선후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에는 평양식 마마배송굿 장면이 담겨있다.

고려는 통일신라 의학을 바탕으로 중국 송나라, 인도, 이슬람 등과 의술 교류를 통한 발전을 이어갔다. 오늘날 한의학 시스템을 성립한 가장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중국의 '황제내경'도 절반은 고려의 침경을 담고 있다. 침과 뜸의 종주국인 고려의 의학 수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고려는 궁궐에 태의감이란 의료기관을 설치했고, 독자적으로 우리나라 약재에 맞는 의학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편찬했다. 민간에서 쉽게 구하는 약재로 급한 병을 치료하는 방문(方文)을 모아놓은 것이어서 고려 의학의 대중화와 본초학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의 의학은 자주성을 강화했다. 세종대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인조대 '침구경험방', 조선 후기 광해군대의 '동의보감', 정조대 '마과회통', 고종대 '동의수세보원' 등은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의료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고려의 '향약구급방'과 조선의 '향약집성방'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로 병을 치료하려 했던 노력의 결실이다. '의방유취'는 세계 각국의 의술을 집대성한 책으로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치료법까지 담고 있다.
고려의 '향약구급방'과 조선의 '향약집성방'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로 병을 치료하려 했던 노력의 결실이다. '의방유취'는 세계 각국의 의술을 집대성한 책으로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치료법까지 담고 있다.

'향약집성방'은 각 질병의 증상과 의학적 해석, 처방 및 약 제조법, 치료법의 출전까지 담은 종합 의학서적이다. '의방유취'는 동양 최대의 의학사전으로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 의서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자료다. 이들 책은 허준의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의학서적으로 꼽힌다.

특히 ‘동의보감’은 우리 풍토에 맞춰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제시한 의학책으로 세계 최초로 예방 의학을 강조했다. 세계보건기구가 중시하는 ‘정신적·육체적·사회적 건강과 안녕’이라는 이념을 이미 400여년 전에 제시했다. 2009년 7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내과, 외과, 기타 질병, 약을 쓰는 법, 침과 뜸을 쓰는 법 등 모두 다섯 편으로 이루어졌으며 질병을 종류에 따라 ‘항’과 ‘목’으로 나눈 뒤 주요 증상과 치료 방법을 설명하는 식으로 정리했다. 약의 이름도 의원들이 쓰는 전문 이름과 시중에서 민간인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한글 이름으로 함께 기재해 누구라도 쉽게 약재를 찾을 수 있게 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내과, 외과, 기타 질병, 약을 쓰는 법, 침과 뜸을 쓰는 법 등 모두 다섯 편으로 이루어졌으며 질병을 종류에 따라 ‘항’과 ‘목’으로 나눈 뒤 주요 증상과 치료 방법을 설명하는 식으로 정리했다. 약의 이름도 의원들이 쓰는 전문 이름과 시중에서 민간인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한글 이름으로 함께 기재해 누구라도 쉽게 약재를 찾을 수 있게 했다.

조선은 '삼의원'을 둘 만큼 의학에 역량을 쏟았다. 삼의원은 고급병원인 '전의감', 서민병원인 '혜민서', 왕실 전담병원인 '내의원'을 말한다.

전의감은 국가 의료행정의 중추기관으로서 왕실과 문무백관을 진찰했다. 약을 제조하고, 약재를 배양했으며 의학교육과 의료인을 선발하는 의학취재를 맡았다.

혜민서는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서민병원이다. 고려 때 처음 설치된 '혜민국'을 계승해 운영되다가 세조 때 혜민서로 이름을 바꿨다.

내의원은 왕실의 약을 제조하고, 궁궐 내부의 왕실전담병원 역할을 했다. 의사로서 최고의 자리로 꼽히는 '어의'는 자격시험을 거쳐 최고점수로 합격한 사람을 임명했다. 어의는 내의원과 전의감을 통괄했고, 왕실 전담의사 뿐만 아니라 의학 서적 발간과 교육을 담당했다. 태종 때는 궁궐 안의 여성 환자들을 위한 여성 의사인 ‘내의녀’를 뒀다. 내의녀는 궁궐의 여성 환자들은 물론 왕을 진찰하기도 했다.

조선은 가난한 백성을 위한 보건소도 운영했다. 바로 '제생원(濟生院)'이다. 제생원은 빈민을 치료하고, 미아를 보호하는 기능을 했고, 약재 보급과 의학서적 편찬에도 큰 역할을 했다. 1398년 우리 약재로 병을 치료하는 '향약제생집성방'을 펴냈고, 세조 이후 혜민서에 통합됐다.

조선의 의료기관인 혜민서는 현재 서울 을지로2가 108-1번지에 터가 남아있고, 전의감은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에 터가 남아있다. 제생원은 계동 140-2번지에 터가 남아있다.(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
조선의 의료기관인 혜민서는 현재 서울 을지로2가 108-1번지에 터가 남아있고, 전의감은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에 터가 남아있다. 제생원은 계동 140-2번지에 터가 남아있다.(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

삶이 어려운 백성들을 무료로 치료하고 구제한 역사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다. 고려는 1049년(문종3년)에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설치해 빈민들을 치료했고, 1112년(예종7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을 두고 백성들에게 무료로 약을 나눠줬다. 이들 기관은 조선시대의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 제생원, 혜민서의 설립 정신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