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④우리 역사 속 위대한 건축가와 전통집 이야기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④우리 역사 속 위대한 건축가와 전통집 이야기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6.23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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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우리 역사 속 위대한 건축가와 전통집 이야기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교육사랑신문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네 번째 주제는 ‘건축가(建築家)’입니다. 건축가는 예술적인 재능과 창의력으로 건물을 설계하고 완성시키는 사람입니다. 설계에 따라 건물이 완성되는 과정을 총괄합니다. 우리 역사 속 건축가는 어떤 인물이 있을까요? 또 우리의 주(住)생활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요? 학생기자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편집자 주>
우리 역사 속에서 건축가의 이름은 '도편수', '목수' 등으로 불렸다. 말 그대로 나무를 다루는 사람을 의미한다.(사진=문화재청)
우리 역사 속에서 건축가의 이름은 '도편수', '목수' 등으로 불렸다. 말 그대로 나무를 다루는 사람을 의미한다.(사진=문화재청)

건축가는 건물을 지을 때 계획을 수립하고, 설계를 하며 감독하는 사람이다. 건축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architect'는 라틴어 'architectus'에서 유래됐다. 라틴어 단어는 그리스어 'arkhitekton'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arkhi'는 대장, 'tekton'은 건설자를 의미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는 ‘도편수(都邊首)’라는 명칭이 건축가를 의미했다. ‘도편수’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 건축공사를 담당하던 기술자의 호칭으로 각 분야의 책임자인 변수(邊首)의 우두머리라는 뜻을 지녔다.

사실 '건축가'라는 이름은 근대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목수(木手)'라는 이름이 훨씬 오랫동안 사용돼 왔다. 목수는 말 그대로 나무로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로 나무를 마름질해서 궁궐이나 사찰, 가옥을 짓는 대목(大木)과 장롱, 문짝, 탁자나 쟁반 같은 작은 가구를 짜는 소목(小木)의 총칭이다.

오늘날에는 두 기술자를 한 이름으로 일컫지만 예전에는 따로 구분했다. 목수도 본래는 목업(木業)으로 불렸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봉록조(俸祿條)에는 이들을 소목장(小木匠)과 목업으로 구분했다. 이들은 중상서(中尙署)와 도교서(都校署)에 2명씩 배속됐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시대만 해도 궁궐이나 성곽, 사찰을 짓는 건축기술자들의 우두머리였던 대목(大木)이 우월한 신분에서 공사를 이끌었던데 반해 조선의 도편수는 낮은 사회적 대우 속에서 감독관의 지시 아래 주어진 범주 안에서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전통건축의 공사현장에서는 도편수라는 호칭이 관습적으로만 쓰인다. 문화재청은 목수 분야를 집 전체의 뼈대를 제작하는 대목장(大木匠)과 실내의 가구 등을 제작하는 소목장(小木匠)으로 구분한다. 대목장이 건물 전체를 총괄하는 건설 총책임자인 셈이다.

목수는 궁궐이나 사찰, 가옥을 짓는 대목과 장롱, 문짝, 탁자를 짜는 소목으로 나뉜다.
목수는 궁궐이나 사찰, 가옥을 짓는 대목과 장롱, 문짝, 탁자를 짜는 소목으로 나뉜다.

신분 차별이 뚜렷했던 조선 시대만 벗어나도 우리 역사 속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뛰어난 대목장 ‘건축가’는 많다. 삼국시대의 기록에는 유명한 건축가의 이름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비지(阿非知)다.

'삼국유사' 권3 황룡사9층탑조의 기록에 따르면 아비지는 백제인이다. 당시만 해도 신라의 목공 기술이 백제보다 뒤떨어져서 선덕여왕이 당대 최대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을 짓기 위해 백제 목수인 아비지를 초빙했다. 아비지는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김용춘이 거느리는 200명의 소장(小匠)들을 부려서 탑을 완성했다.

황룡사 9층목탑은 몽골이 침입했을 때 소실됐지만 아파트 30층 규모의 웅장한 모습으로 추정된다. 9개의 층은 백제와 일본, 당, 오월, 탐라, 말갈, 거란, 여진, 예맥 등 신라 주변에 있던 나라를 뜻했다. 부처의 힘으로 이 나라들이 신라를 섬기도록 기원한 탑이다.

때문에 백제사람인 아비지는 탑을 짓던 중 고뇌에 빠진다. 하지만 한 스님과 힘센 장사가 대웅전에 목탑 기둥을 세우는 꿈을 꾼 뒤 모든 것이 부처의 뜻이라고 생각해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백제사람 아비지가 세운 황룡사9층목탑은 몽골의 침입으로 불탔지만 최근 황룡사지 복원을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 사진은 문화재청의 조감도다.
백제사람 아비지가 세운 황룡사9층목탑은 몽골의 침입으로 불탔지만 최근 황룡사지 복원을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 사진은 문화재청의 조감도다.

당대 백제인의 빼어난 건축기술은 바다 건너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고 자랑하는 호류사(法隆寺)도 백제인이 건너가서 세웠다. 특히 세계 최장수 기업으로 손꼽히는 일본의 곤고구미(金剛組)는 1500년 전 백제인이 세운 건설회사다. 곤고구미는 578년 쇼토쿠(聖德) 태자의 요청으로 시텐노지(四天王寺) 건립에 파견된 백제기술자 류중광(柳重光)이 세웠다. 사천왕사가 완공된 후 유지 보수를 맡아달라는 쇼토쿠 태자의 간청에 일본에 눌러앉아 세운 회사다. 류중광은 이름을 곤고 시게미쓰(金剛重光)로 바꾼 뒤 금강조(곤고구미)를 세운다. 자신의 성인 금강(金剛)에 협동조합이라는 의미의 '조(組·구미)'를 썼다. 함께 일본으로 온 백제 장인들과 동업 형태의 회사인 셈이다.

지난 2016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통일신라의 김대성(700~774)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로 선정했다. 김대성은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중시(中侍)를 지낸 통일신라 시대 인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을 주도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수학적 비례 원칙이 적용돼 뛰어난 안정미와 균형미를 갖추고 있다. 특히 지진에 강한 '그랭이 공법'과 '동틀돌' 등 과학적 건축기술은 최근 경주지역에서 발생한 강진도 거뜬히 이겨냈다.

그랭이 공법은 자연석에 기둥을 세울 때 기둥 아래쪽을 자연석 윗면의 굴곡과 같은 모양으로 맞춰 자연석과 기둥이 톱니바퀴가 물리듯 맞물리게 하는 기법이다. 동틀돌은 석재가 흔들리지 않도록 못처럼 규칙적으로 설치한 돌이다.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건축가인 김대성은 그랭이 공법과 동틀돌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 천년사찰 불국사와 석굴암을 완성했다. 오른쪽 사진에서 돌의 굴곡을 따라 상판석의 아랫부분을 깎은 것이 그랭이 공법이고, 튀어나온 돌이 동틀돌이다.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건축가인 김대성은 그랭이 공법과 동틀돌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 천년사찰 불국사와 석굴암을 완성했다. 오른쪽 사진에서 돌의 굴곡을 따라 상판석의 아랫부분을 깎은 것이 그랭이 공법이고, 튀어나온 돌이 동틀돌이다.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의 모습(사진출처:문화재청)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의 모습(사진출처:문화재청)
국보 제24호 석굴암 구조도. 석굴암은 지난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됐다.
국보 제24호 석굴암 구조도. 석굴암은 지난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됐다.

넓은 의미로 건축가는 사용자의 요구사항을 건축 환경에 반영하는 사람이다. 건축가는 언제나 일반 대중의 삶의 질과 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전문적인 의사결정을 한다. 그만큼 전문화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실제로 건축에 참여하려면 면허를 취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중기 수원화성 건설을 주도했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뛰어난 학자이자 건축가였다. 성의 설계도를 그리고, 성을 쌓는데 필요한 재료와 비용까지 계산했다. 수원화성을 짓는 과정과 설계도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일종의 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는 연인원 1만 명의 인부와 70만 개의 벽돌, 2만 개의 목재가 투입됐다고 기록돼 있다.

정약용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크레인 '거중기(擧重器)'를 발명해 10년의 예상 공기를 단 2년 6개월로 줄였다.

정약용 선생이 발명한 수동식 크레인 거중기는 공사 기간은 크게 단축했다. 백성들의 노동력과 정부의 예산을 절감한 실학자의 면모를 알 수 있는 기계다.
정약용 선생이 발명한 수동식 크레인 거중기는 공사 기간은 크게 단축했다. 백성들의 노동력과 정부의 예산을 절감한 실학자의 면모를 알 수 있는 기계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절절함과 정약용의 충심이 빚어낸 조선 성곽 건축물의 백미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절절함과 정약용의 충심이 빚어낸 조선 성곽 건축물의 백미다.

수원화성은 면적 37만 1,145㎡, 성곽 길이 약 5,744m, 높이 약 4.9∼6.2m 규모로 군사와 정치, 행정적 목적을 두루 갖춘 성이다. 성벽의 바깥쪽을 쌓으면서 안쪽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과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의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거중기·활차(滑車)·녹로 등 근대적 기기의 발명과 사용 등은 기능성과 과학성,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모두 갖춰 한국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