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 충남도청 개청 10주년 특집] 내포 가야산, 아는 만큼 보인다..."기능 확장하려면 충남도의 적극적인 홍보 절실"
[내포 충남도청 개청 10주년 특집] 내포 가야산, 아는 만큼 보인다..."기능 확장하려면 충남도의 적극적인 홍보 절실"
  • 김상희 기자
  • 승인 2023.08.1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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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이기웅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장, "19년 연구 결실 '가야산역사문화총서 3권', 후대 연구자들의 길잡이 되길"

조선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이백리를 가다보면 가야산이 있는데 이 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이 바로 내포다"라고 썼다. 이중환이 가리킨 열 고을은 현재의 충남 예산, 덕산, 홍성, 결성, 서산, 해미, 태안, 당진, 면천, 신창(아산) 등이다. 모두 가야산의 사방(四方)에 위치한 고을이고, 충남도청소재지가 예산·홍성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내포신도시'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이유다. 올해 충남도는 내포신도시 개청 10주년이 된다. 지난 10년 동안 충남도는 15개 시·군을 아우르는 행정중심 신도시를 조성하고, 내포문화권의 정체성 확립에 구슬땀을 흘렸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내포의 주산(主山)인 가야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관심은 미흡했다. 2023년 내포 충남도청 개청 10주년을 맞아 '내포의 주산(主山), 가야산의 문화관광 발전 및 기능 확장을 위한 제언' 기획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아는 만큼 보인다."

조선 정조대왕 때의 문신 유한준(兪漢雋)이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발문으로 부친 문장의 한 구절이다.

원래 문장은 "지즉위진애(知則爲眞愛) 애즉위진간(愛則爲眞看) 간즉축지이비도축야(看則畜之而非徒畜也)"다. 풀이하면,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저 모으는 것은 아니라네"가 된다.

자연으로 치면 충남 내포의 가야산이야 말로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의 세계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된다.

마침 내포 가야산에 미친 사람이 있다.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를 세워 20년 가까이 내포 가야산 연구에 매진하는 이기웅 소장이다. 예산 사람인 이기웅 소장은 지난 2005년부터 가야산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해 오고 있다.

왜 내포 가야산일까? 이기웅 소장은 알면 알 수록 헤어나기 힘든 산이라고 단언했다. 그야말로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의 경지다. 다음은 이기웅 소장과 일문일답이다.

- 내포 가야산을 오랫동안 연구해 오신 것으로 압니다. 어떤 이유로 가야산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제 고향이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입니다. 유소년 시절 가야산은 집앞에 무심히 서있는 풍경의 하나였습니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살던 중 문득 가야산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찾아보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게 2005년입니다. 귀소본능처럼 몸이 반응한거죠. 무모하게 시작한 가야산 사료 조사가 어느덧 고려시대, 조선 후기까지 내포 가야산과 가야사의 실상을 기록한 문헌을 찾는 고단한 작업으로 이어졌어요. 지금은 그동안 모은 결과물을 후대 연구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뭔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가야산 연구에 매진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 내포와 가야산 일원은 조선시대 만해도 명문 사대부들에게 양택(주거지)과 음택(묘지)으로 두루 사랑받은 곳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내포 가야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내포 가야산 연구에서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요?  

"광복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충남 예산, 홍성, 서산, 태안, 당진, 아산지역을 '내포(內浦)'라고 불렀습니다. 일찌감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쁜데다 수도 한양의 남쪽과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사대부들에게 '사람 살기 좋은 터'로 인기를 끌었죠. 권력과 재력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물자와 문화, 생활사 등이 풍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내포 가야산을 이해하려면 고전문헌에 대한 해독이 필수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조극선의 일기인 <인재일록(15~29세)>과 <야곡일록(30~41세)>, 이의숙의 <가야산기>, 이철환의 <상산삼매> 등이 있습니다. 이들 문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가야산의 역사와 내포지역의 문화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가야산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어려운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한자 텍스트에 대한 해석 능력을 꼽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들 문헌을 한글화하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한자 해독 자체만이 아니라 문학, 역사, 철학, 지리 등의 여러 분야의 지식을 필요로 했던 지난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 19년 동안 가야산역사문화총서 3권의 역작을 내셨습니다. 어떤 책인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권 <길보유고(吉甫遺稿)>는 예헌 이철환(李喆煥·1722-1779) 선생이 내포 가야산을 여행하면서 남긴 유람기를 담고 있습니다. 책의 번역은 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조성환 박사께서 맡아주셨습니다. 2권 <가야산에서 한국사를 읽다>는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가 가야산 일원을 발로 뛰면서 조선시대 시문을 찾아 번역하고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저처럼 내포 가야산에 푹 빠진 김헌식 박사, 조성환 박사와 함께 가야산의 절터와 문헌을 찾아 고증하면서 완성한 책입니다. 책의 집필은 평론가 김헌식 박사님이 맡았습니다. 3권 <내포 가야산 한시기행>은 조선 중·후기 가야산 일원의 불교와 시대상을 면밀하게 살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요즘에는 그동안 발굴한 사료를 바탕으로 4권 <가야구곡 이야기-가야산 사람들의 꿈>과 5권 <내포 가야산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국내외 서고에 있는 문헌들을 더 많이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조사할 계획입니다. 내포 가야산이 충남도민과 대한민국 모두에게 사랑받는 곳이 되려면 문헌에 근거하는 내실있는 연구가 반드시 선행돼야 합니다. 가야산역사문화총서 발간을 계기로 충남 내포지역 역사의 연구가 활발해지고 가야산에 대한 결과물이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 내포의 가야산은 어떤 매력이 있습니까?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방의 작은 산에 몰입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내포 가야산은 매우 특이한 산입니다.(웃음) 일단 서울 경기권을 벗어나서 왕실 유적이 있는 경우부터 매우 특이한 사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산에 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가야산에는 흥령군묘, 명빈 박씨와 연령군 묘, 남연군묘, 명종태실 등이 집중돼 있습니다. 사실 가야산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많은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광해군 때부터 가야산은 왕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광해군의 아들 이지가 도망가려 했던 땅이 바로 가야산입니다. 조극선의 <인재일록>에는 '어제 모두 가야사에 모였다. 가야사는 지금 동궁의 원당이다. 궁중 노비라는 자가 막 와서는 양반 욕질을 해댔다. 그래서 돌아왔다(昨日會伽寺 今爲東宮願堂 所謂宮奴者方來 辱極兩班 故還也)'는 내용이 있습니다. 승려들이 천민 취급되던 사회에서 조극선이라는 예산지역 양반이 가야산 가야사에 놀러 갔다가 혼쭐이 나서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동궁의 원당이라는 말은 가야사가 훗날 왕이 될 세자의 원찰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동궁이 바로 광해군 세자 이지입니다. 세간에는 이런 이야기를 쏙 빼놓고 가야산에 도적이 많았다느니, 폐사지에 있는 숯가마꾼들의 움막 흔적을 화적떼의 거처라는 식으로 왜곡을 해댑니다. 황진기, 강징위같은 동학인들의 역사에는 눈을 감고, 남연군묘를 도굴했던 오페르트에 대항한 주민들의 저항정신과 문화유산을 그저 흥미 위주로 입에 올립니다. 이런 점이 아쉬우면서도 나부터 가야산을 연구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문헌적 고증이 탄탄하면 그 위에 쌓는 스토리텔링과 관광 산업으로의 연계가 제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내포 가야산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떠올리는게 사실입니다. 또 흥선대원군이 천하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운 이야기도 회자됩니다. 가야산역사문화총서를 살펴 보니 흥선대원군이 가야산에서 한달살이를 했다는데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합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만 해도 역사책 한줄 내용이 아니라 여러가지 이야기 요소가 있습니다.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했으니 마을 주민들은 당연히 저항을 했고, 피해자도 3명이나 나왔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건 정부의 대응이었습니다. 왕실에서 225명이나되는 군인을 보냈는데 그저 여덟 밤을 지내고 돌아갔습니다. 그냥 보여주기 식으로 시위만 하다 간 거죠. 사실 2005년부터 가야산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다양한 문학적 요소를 찾아냈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내용들인데 지역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이 놀랄 만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을 키워드로 하자면 1865년도에 가야산에서 한 달 정도 살다갔는데 당시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왕의 아버지가 왔으니 백성들이 일거리가 많아졌어요. 길도 내고, 돌도 빼고, 풀도 깎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돈 한푼 못 받으니까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주민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관직을 주거나 세금과 병역을 면제하는 특혜를 줬습니다. 특채로 종2품 오위장(五衛將)이 되고, 운현궁에 취직한 분도 나왔습니다. 동네 전체가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 직통 라인을 가진 마을이 된 겁니다. 실제로 가야산 자락에는 일종의 게이트가 설치돼 지방행정과 별도로 운영됐습니다. 또 하나 흥선대원군과 가야사의 관계도 좀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대원군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어요. 가야사 터가 천하명당이어서 남연군 묘를 이장하려면 뺏어야했지만 불태우거나 때려 부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야사에 있던 고려 나옹화상이 조성한 금탑(金塔·석탑이지만 상륜부가 반짝거려 붙은 별명)이나 통일신라 철불도 파괴되거나 반출됐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남연군 묘 아래에 부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내포 가야산을 연구하면서 아쉬운 점이나 개선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내포의 중심인 가야산과 예산지역이 가진 이쪽 동네의 문화적인 저력을 믿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마을 중앙에 3만평의 국유지가 조성된 곳은 별로 없습니다. 3만평의 국유지를 활용하고 가야산 종합정비계획을 철저하게 세워 여러 유물과 이야기 소재를 찾아내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주민들은 농사만 짓던 분들이라 문화재가 무엇이고, 어떻게 보존해서 어떻게 상생 발전시켜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인식이 변해야 합니다. 충남도와 예산군이 적극적으로 주민들을 대상으로 가야산의 인문학, 종교, 생활사 등의 주제특강 등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가야산을 연구하면서 특히 문제점으로 생각한 것은 '행정적'으로 갈라져 있다는 점입니다. 서산의 가야산이네, 예산의 가야산이네, 홍성과 당진의 가야산이네 말은 많지만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초 시·군에서 못하면 충남도가 중심을 잡고, 내포 가야산에 대한 체계적인 발전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단순히 행정이 아닌 문화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행정에서 다루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민간 분야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민·관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면 가야산이 지금보다 더 좋은 관광자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충남도가 내포 도청 개청 10주년을 맞아 가야산의 기능 확장과 문화관광 전략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평소 생각해왔던 가야산의 발전 방향이 있으신가요?

"가야산이 관광 산업 측면에서 발전하고, 제대로 기능을 확장하려면 먼저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도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가야산에 무슨 문화재가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저에게 많이 묻습니다. 가야산에는 선사시대 성혈(性穴, cup-mark)도 있고, 청동기 유적도 있습니다. 밖으로 반출돼 보물로 지정된 유물도 있습니다. 성혈 유판 암각화도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귀부(龜趺)만 해도 서산 보원사지의 법인국사탑보다 예술적으로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길이 2.6m에 비석의 몸체는 없어졌지만 육각문을 이용한 구갑문(龜甲文)과 이무기 머리는 상징성이 큽니다.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합니다. 하다못해 가야산 입구와 내포신도시 들어가는 길목, 서산시로 빠져나가는 교차로 등에 가야산 유물 유적과 왕실 유적 등을 소개하는 안내판부터 설치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가야산 만을 주제로 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묶어 해설하는 관광 상품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야사지에서 발견된 유물들도 좋은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서해선 복선전철 삽교역(내포역)이 생깁니다. 예산 삽교역에서 출발해 덕산과 수덕사, 해미, 개심사, 문수사, 여미리, 마애삼존불까지 이어지는 순회 투어버스를 만들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가야산이 차 없이 여행하기 힘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내포신도시에 정착해 사는 사람이 늘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유입될 수록 가야산의 역사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해야 지역의 상권도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야산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과 유물을 찾아 관광산업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면 가야산이 내포 지방의 전체의 진산(鎭山)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인터뷰 박성민 기자/정리 김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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