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 충남도청 개청 10주년 특집] 내포 가야산, "한국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통로"
[내포 충남도청 개청 10주년 특집] 내포 가야산, "한국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통로"
  • 김상희 기자
  • 승인 2023.11.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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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내포 호서유학의 현대적 가치, "기호유교 성지이며 애국독립운동의 사상적 뿌리"

조선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이백리를 가다보면 가야산이 있는데 이 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이 바로 내포다"라고 썼다. 이중환이 가리킨 열 고을은 현재의 충남 예산, 덕산, 홍성, 결성, 서산, 해미, 태안, 당진, 면천, 신창(아산) 등이다. 모두 가야산의 사방(四方)에 위치한 고을이고, 충남도청소재지가 예산·홍성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내포신도시'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이유다. 올해 충남도는 내포신도시 개청 10주년이 된다. 지난 10년 동안 충남도는 15개 시·군을 아우르는 행정중심 신도시를 조성하고, 내포문화권의 정체성 확립에 구슬땀을 흘렸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내포의 주산(主山)인 가야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관심은 미흡했다. 2023년 내포 충남도청 개청 10주년을 맞아 '내포의 주산(主山), 가야산의 문화관광 발전 및 기능 확장을 위한 제언' 기획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한국 역사에서 유교(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완성을 이뤄낸 곳은 누가 뭐래도 호서지방이다. 호서(湖西)는 말 그대로 호수의 서쪽 지방이고, 이때 호수는 충북 제천의 의림지(義林池)다. 호서지방은 현재의 충청남·북도다.

문성공 안향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주자학(성리학)을 들여온 고려의 학자로 알고 있지만 이보다 앞서 몽골을 피해 고려에 망명한 남송의 성리학자 정신보(鄭臣保)가 서산지역에서 성리학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신보는 송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을 지냈으며, 몽골의 침략으로 송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1237년(고종 24) 고려로 망명했다. 서산 간월도에 정착해 살면서 고창군부인 오씨와 혼인했고, 아들 정인경이 1289년 충렬왕이 원나라 연경에 갈 때 호위시종으로 따라가면서 안향을 고려 유학제거(성균관 관장)에 제수하게하고,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해 오도록 권했다.

이후 원나라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고려 유학을 크게 부흥시키니 1237년 정신보의 성리학 전래는 안향이 1290년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온 것보다 53년 전의 일이다. 한국 유교의 뿌리가 충남인 셈이다.

제천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 수리 시설 가운데 하나다.

더구나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조선에서 후기 300년을 지배한 유학의 주류는 영남학파가 아니라 기호(호서)학파였다. 조선시대의 학문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발달했는데 조선 후기 300년간의 중앙정계는 대체로 호서세력이 주도했다. 

선조대에 사림정치가 실시되면서 영남계의 동인이 우세해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은 적은 있다. 하지만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고, 영남 남인계(경상좌도)의 유성룡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영남 북인계(경상우도)의 정인홍은 서인계의 인조반정으로 쫓겨나면서 인조반정 이후에는 대체로 경기·호서계의 서인(노론)이 한말까지 계속 정권을 주도했다. 조선 정부에는 기호남인만이 야당으로 남아 외롭게 투쟁했다.

문신관료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던 조선시대에는 끊임없이 정치운영 원리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후기 여당에 해당하던 기호학파의 유학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사대부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았던 가야산 주변 내포 열 고을은 수많은 이름높은 선비들을 배출하면서 조선을 주름잡았던 호서학파의 '인큐베이터'가 됐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 유학은 기호유교문화권의 성지이면서 당대의 선진문화 '유학'의 유입과 전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

내포의 호서유학은 1700년대 내포의 유학자 남당 한원진(韓元震)과 외암 이간(李柬)의 ‘인물성동이논쟁'을 통해 또 하나의 정치 철학의 씨앗을 뿌린다. 바로 위정척사 사상이다. 위정(衛正)이란 바른 것, 즉 성리학과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자는 것이고, 척사(斥邪)란 사악한 것, 즉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것이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침략·반외세의 정치사상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며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는데 거리낌 없었던 내포지역에서 남당 한원진의 인물성이론(사람과 사물의 성질이 다르고, 조선과 오랑캐가 같을 수 없다)이 태어난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내포에서 발원한 위정척사 운동은 을미사변 이후 일어난 의병운동과 국내외 항일독립운동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남당 한원진 영정(홍주성역사관 자료)
남당 한원진 영정(홍주성역사관 자료)

내포지역이 선진문물의 용광로였다면 가야산은 수용과 발전의 통로였다. 내포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국 선종(불교)과 성리학(유교), 천주교(개신교) 3대 종교의 유입과 발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가야산 주변의 내포는 기호(호서)유교의 성지이면서 애국독립운동의 사상적 뿌리다. 지난 1996년 충청남도 개도 100주년 당시 충남을 대표하는 5대 정신(충효·절의·선비·예의·개척)을 수립했다면 내포 충남도청 시대에 걸맞는 충남정신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문·역사·문화는 21세기 산업의 꽃인 문화관광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내포 충남도청 개청 10주년을 맞아 내포 가야산의 문화관광 발전과 기능 확장에 내포 호서유학의 흐름과 현대적 가치를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다.

다음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홍제연 박사와 일문일답이다.

- 올해는 내포 충남도청 개청 10주년입니다. 흔히 충남의 정신으로 '선비정신'을 꼽습니다. 과연 '선비정신'이란 무엇인가요?

"지역 정신은 어느날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고 어느 한사람의 주장으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오랜 세월 문화적 공동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발전하여 우리 생활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충남의 정신으로 꼽는 ‘선비정신’은 매우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비’하면, 관직과 재물보다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혹은 현실에 어두운 사람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 선비란 조선 사회에서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며 특히 유교적 이념을 적극 수용하여 사회에 적절히 구현함으로써 선행을 베푸는 인격체를 선비라고 부릅니다. 선비는 조용히 앉아 정신수양만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공직에 나아가 백성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국가와 민족에 어려움이 닥쳤을때에 스스로 일어서 목숨을 걸고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는 사람들이고 불의에 굴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호서유학의 조종(祖宗)이라 하는 율곡 이이는 참된 선비란 벼슬자리에 나아가면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태평을 누리게 하고, 관직에서 물러나면 온 세상에 교화를 베풀어 학자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호서지역 유학자들은 이 가르침을 대대로 전승했습니다. 따라서 선비정신이란 참된 인간을 추구하는 자기 수양의 정신, 어질고 의로운, 즉 도의와 염치를 몸으로 실천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이중환의 책 <택리지>는 충남도청이 이전한 내포의 중심으로 가야산을 지목하면서 사대부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뛰어난 명현들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내포 유학을 대표하는 선비는 어떤 분들이 있나요?

"내포지역을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하자면, 태안 서산 아산 홍성 예산 보령 청양 서천 등 8개 시군이 포함됩니다. 이 지역에서 고려말부터 조선초기 성리학의 도입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배출되며 지역 단위에서 유교문화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조선시대의 유학은 학맥, 혼맥이 바탕이 되어 발전하였는데 충청지역은 율곡(이이)학파와 우계(성혼)학파가 주류를 이뤘습니다. 율곡과 우계는 한 살 차이의 동년배이며 같은 지역에 살며 교류하던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이 두 학파는 정치적으로 모두 서인계로 활동하다 율곡학파는 노론, 우계학파는 소론으로 갈라집니다. 이중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학파는 김장생, 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집니다. 이후 1700년대에 조선 3대 철학 논쟁중 하나인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호락(湖洛)논쟁'을 이끈 홍성 출신 한원진과 아산 출신 이간 선생이 대표적인 율곡학파입니다. 한원진은 권상하 문하의 적통입니다.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의 문인을 일컫는 우계학파에서는 아산 신창에서 강학을 펼친 잠야 박지계(潛冶 朴知誡)가 있습니다. 학덕이 높았고 영남학파와도 교류하였으며, 아산 출신의 포저 조익(浦渚 趙翼), 공주(대전) 출신의 탄옹 권시(炭翁 權諰) 등과 더불어 도학을 강론했습니다. 포저 조익은 아산에서 활동했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입니다. 묘소가 아산 신창에 있고, 신창 도산서원에 제향됐습니다. 예산 출신의 야곡 조극선(冶谷 趙克善)은 우계학파를 계승했고, 사후 신창 도산서원에 제향됐습니다."

- 한국 유교문화의 중심은 조선의 정치, 행정, 문화, 학문의 전반을 주도했던 기호학파 특히 충남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던 우암 송시열과 명재 윤증 선생의 '예송논쟁'과 남당 한원진과 외암 이간 선생의 '인물성동이논쟁'이 대표적입니다. 두 논쟁이 현재 한국 사회에 전하는 영향과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철학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의 근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공간에 사자, 원숭이, 바나나가 있을때에 서로 관련있는 것을 묶으라 하면 동양인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서양인은 사자와 원숭이를 엮는다고 한다. 동양인이 상호 관계성에 무게를 둔 반면, 서양인은 개체의 본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은 모두 자신들의 문화권이 가진 철학과 정체성에 기인합니다. '예송논쟁'과 '인물성동이논쟁' 모두 성리학에 관한 해석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습니다. 이 두가지 복잡한 철학논쟁을 현실에 대입하여 간단히 말하자면 예송논쟁은 왕과 백성이 같은 예를 따를 것인지, 서로 다른 예를 적용할 것인지가 쟁점이었습니다. 또 인물성동이논쟁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 즉 우리와 오랑캐를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느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쪽을 택할 것인가의 판단은 자기가 가진 철학에서 비롯됩니다. 왕과 백성을 동일한 존재로 바라보는 순간 세상은 달라집니다. 왕이 잘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이 고난을 겪는다면 그 왕은 교체가 가능합니다. 또 오랑캐가 우리와 다르다고 한다면 그들은 배척해야하는 대상이므로 비록 오랑캐가 신문물을 가지고 있더라도 절대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한 집단이 가진 신념이 국가와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조선시대의 철학논쟁을 공리공담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갈등과 논쟁이 없는 정치체제는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역사는 한걸음 진보합니다. 현재 한국사회는 이런 심도있고 품격있는 논쟁이 부재한 것이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 충청남도는 여말선초 성리학이 수용되던 시기에 불사이군의 충절을 실천했던 중요 인물들의 태생지와 활동 근거지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소개해 주세요.

"기원전 500여년 전 중국 춘추시대에 공자에 의해 체계화 된 유학은 점차 발전하며 12세기 전후한 시기 송나라때에 주희(주자)에 의해 성리학으로 집대성됐습니다. 이 시기 한반도는 고려 인종 무렵이었는데, 고려의 학자들이 중국으로 가 유학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1200년대 후반 충렬왕때 경상도 영주(풍기) 출신 안향(安珦, 1243~1306)이 1290년에 원나라에서 <주자전서>를 가져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 전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반세기 전 1237년(고려 고종 24)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신보(鄭臣保, ?~1271)가 남송이 망할 무렵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의리로 서산의 간월도에 망명하여 서산 정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이때 고려에서 성리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또 원나라에 10년간 머물면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돌아오면서 성리학 관계 서적을 다량 수입하여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보급한 사람으로 남포(보령) 출신 백이정(白頤正, 1247~1323)입니다. 백이정의 묘소는 보령시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그곳에 그를 모신 신안사(新安祠)와 그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한국 유교문화는 이런 내포지역의 선각자들에 이어 이제현(李齊賢), 이숭인(李崇仁),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등의 여말선초 유학자들에 의해서 학문적․사상적 수용의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백이정의 뒤를 이어 성리학 보급에 크게 기여한 것은 이곡(李穀, 1298~1351), 이색(李穡, 1328~1396) 부자를 비롯한 한산이씨(韓山李氏) 가문입니다. 이들은 지금의 서천군 한산 출신입니다. 조선초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이개(李塏, 1417~1456)는 이색의 증손자이고, 기묘명현록에 올라있는 이자(李耔, 1466~1524)도 이색의 후손입니다."

- 조선이 개국되고 사림정치가 정착되기 이전에 어려운 조건 속에서 선진적인 가치 체계인 유교를 정착시키는데 노력한 인물들에는 내포 선비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어떤 인물들이 있나요?

"고려말 유입된 성리학이 뿌리내린 후, 산림에 묻혀 성리학을 연구하던 지식인들이 점차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기득권을 가진 훈구파와 대립하게 되자, 이들을 사림파라 부르게 됐습니다. 훈구파는 조선 초 막강한 권력을 가진 공신들이었습니다. 사림이 정계에서 주류가 된 시기는 1500년대 중반 무렵입니다. 조선 건국 후 150년간은 조선 건국과 세조의 왕위찬탈 등에 공을 세웠던 이들이 정치를 주도하였는데 이 시기 내포의 유학자들의 활동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단종복위운동으로 끝내 죽임을 당한 사육신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 1418~1456)은 홍성 노은동 외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21세 때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집현전 학사로 발탁됐고,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개, 이석형 등과 함께 학문연구에 전념했습니다. 음운학에도 조예가 깊어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456년(세조 2) 아버지 성승과 박팽년, 이개, 유응부, 유성원, 하위지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위한 거사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성삼문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다 희생된 실천적 지성인이었습니다. 또 한사람의 사육신 이개(李塏, 1417~1456)는 목은 이색의 증손자입니다.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제정에 참여했고, 단종의 스승이었습니다. 그 또한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한 죄로 거열형을 당했습니다. 청백리 재상으로 널리 알려진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 1360~1438)은 아산의 신창 출신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사서언해(四書諺解)>, <초학자회(初學字會)>, <손자주해(孫子註解)> 등을 번역한 귀산 김구(歸山 金鉤, 1379~1462)는 경주김씨로 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 같은 맥락에서 내포유학의 흐름, 선진문화인 유교의 유입과 전개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인물들은 누가 있나요?

"한국의 유교는 16세기에 이르면 ‘조선적 성리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독자성을 지니고 발달합니다. 16세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화담 서경덕(1489~1546), 퇴계 이황(1501~1570), 남명 조식(1501~1572), 율곡 이이(1536~1581), 우계 성혼(1535~1598)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중 서경덕의 문인으로 충남의 내포지방에 살던 이지함(李之函)‧서기(徐起)‧홍가신(洪可臣) 등은 주목해야 합니다. 보령 출신의 토정 이지함(1517~1578)은 유학 뿐 아니라 도가사상, 상수학(象數學)에도 관심이 많았고, 상공업도 중시했으며 천문‧지리‧의학‧복서‧산수 등에 두루 능통했습니다. 그의 묘소가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에 있고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돼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조카인 이산해를 비롯해 유몽인‧김신국 등 북인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 고청 서기(1523~1591)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학문에 심취하여 많은 문인을 길러냈습니다. 홍주 상전리(현재의 청양)에 지내다 말년은 공주에서 살았습니다.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제작했고, 조헌(趙憲)등과 함께 동방분야도(東方分野圖)를 고쳤습니다. 동방분야도는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독자적인 천문체계였습니다. 만전당 홍가신(1541~1615)은 화담의 제자인 민순(閔純, 1519~1591)의 제자입니다. 아산 출신이며 홍주목사 재임중 이몽학의 난을 평정했습니다.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1534~1599)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 함께 삼현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불우한 환경에서도 대학자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1569년 36세 때 부친 송사련의 무고사건으로 추국을 당하고, 1586년 53세 때 천민으로 신분이 바뀌어 10여년 간의 피신과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송익필은 63세 때 충청도 면천 마양촌에서 우거하게 됐고, 이곳에서 1599년 별세하여 당진 원당동에 묻혔습니다. 그의 문하에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부자를 배출했으니 호서유학의 큰 기반을 만든 인물입니다. 또 아산 출신의 송파 이덕민(松坡 李德敏, 생졸 연대 미상)과 동명 정두경(東溟 鄭斗卿, 1597~1673), 설봉 강백년(雪峰 姜栢年, 1603~1681) 등의 인물도 기억해야 할 내포의 유학자들입니다."

- 내포지역의 선비정신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구현된 것 같습니다. 우선 실사구시의 실학적 분위기, 천주교의 전래와 확산에 내포지역이 중심지가 된 것, 한말척사위정의 의병운동이 강하게 일어난 것, 동학의 움직임이 크게 발현된 것, 한말개화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의 중요 인물들이 배출된 것 등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이 발현된 것은 어떤 이유와 배경이 있나요?

"아마도 내포지역의 지리적 특징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포지역은 ‘서해’라는 열린 바다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해안에는 열린 바다로 들어오고 나아가는 포구들이 발달하였고, 이 포구를 통해 내포지역은 바깥세상으로부터 다양한 사상이 전래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성리학, 천주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된 곳이 바로 내포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포지역의 문화 특징을 개방성이라고 상징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개방성 때문에 내포지역은 유교, 불교, 천주교, 기독교, 동학 등 배타적인 종교들도 공존할 만큼 다양한 역사 문화의 모습을 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조선왕조의 기본체제가 이완되고 서구의 물결(제국주의)이 도래하면서 충남인들이 가장 강렬하게 반응한 것 같습니다. 내포유교가 어떻게 애국독립운동의 이념을 제시한 통계적인 분석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 어디인가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지만, 보훈부에서 지금까지 서훈한 독립운동가의 숫자를 보면 경상북도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충청남도입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경북은 충남에 비해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는 점, 그리고 현대에 추진된 서훈정책에 경북지역이 더 발빠르게 대응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충남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충남에서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하게 된 배경에는 한말의 위정척사 정신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위정척사는 바로 뿌리깊은 충청 유교문화에서 비롯됩니다. 1700년대 내포의 유학자 남당 한원진(韓元震)과 외암 이간(李柬)의 ‘호락논쟁’(인물성동이논쟁)이 기원입니다. 한원진은 인물성이론(호론)을, 이간은 인물성동론(낙론)을 주장한 학자입니다. 인성과 물성이 같으냐 다르냐의 문제에서 한원진은 우리와 오랑캐는 본성이 다르다고 하며 위정척사 정신의 바탕을 구축했습니다. 한원진의 스승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이, 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지는 호서학맥입니다. 그리고 한원진의 문인들이 내포지역에 포진하면서 그 가르침을 계속 전승했습니다. 내포에서 이름난 의병장과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것은 바로 이렇게 지역사회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문화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이름 없는 수백 수천명의 의병과 독립운동가들도 그를 키워낸 집안의 가풍과 지역의 정서가 바탕이 되어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에는 충남의 관광지로 유명한 홍성의 남당항과 아산의 외암마을이 바로 한원진과 이간이 살았던 마을이며 그들의 호를 딴 지명입니다. 이곳에 깃든 옛 선비들의 정신을 재조명 할 수 있는 문화정책이 필요합니다."

- 조선 과거 급제자의 52%가 충청도 인물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만큼 선비들이 밀집된 고장으로 풀이됩니다. 문제는 충남의 선비정신이나 양반문화를 상기하면 사계, 신독재, 우암, 동춘당 등 조선 중기의 인물들을 떠올리고, 이로 인해 충남 전체의 선비문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포 시대를 맞아 새로운 충남정신을 함양하는 측면에서 내포유학이 재조명돼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내포유학의 현대적 가치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충남의 유교문화를 논산, 계룡, 대전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논산이 충청유학의 표상과 같은 김장생·김집 부자(父子)의 근거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후기 300여년간 중앙 정치를 주도한 이들이 바로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한 이들이었으므로 이 지역이 주목받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충남 내륙지역과는 또 다른 내포의 유학도 크게 부흥했다는 사실에 대해 점차 관심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전기 토정 이지함, 구봉 송익필처럼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이 있었고, 조선후기에는 실학자들을 다수 배출한 곳이 내포지역입니다. 또 한말 위정척사 정신의 의병운동이 내포 사람들을 중심으로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이러한 내포의 유학은 어질고 의로운 '도의'와 '염치'를 몸으로 실천하는 정신인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포시대를 맞이하여 내포지역 유학뿐만 아니라 선비정신이 재조명돼야 할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선비정신을 이른바 ‘꼰대’정신으로 보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식민사관의 의도적인 평가절하와 악평에 더하여 서구화․산업화가 진전되면서 그 가치가 더욱 왜곡된 것입니다. 실제로 선비정신이 그처럼 부정적이었다면, 과연 조선 사회가 수백 년을 온전히 지탱할 수 있었을까요? 내포지역의 선비정신은 다시 찾아야 할 가치가 충분한 충남의 정신입니다. 내포지역의 선비정신인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義 ’정신과 자기 실천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대한민국의 ‘나라 사랑의 정신’으로 확대되어가길 기대합니다."

<본 기사는 (재)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원장 김낙중)의 협조로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