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딸 칼을 들다..."나는 백제의 공주이자 의자왕의 딸, 계산이다"
백제의 딸 칼을 들다..."나는 백제의 공주이자 의자왕의 딸, 계산이다"
  • 권성하 기자
  • 승인 2022.07.22 14: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육사랑신문·충청남도청 공동 주요축제 홍보 캠페인] 제68회 백제문화제, '계산공주 이야기'
나는 백제의 공주 계산이다. 나는 오늘도 칼을 차고 전장에 나선다. 싸우고자 함이 아니라 싸움을 막고자 함이다. 오는 10월 충남 공주와 부여에서 열리는 제68회 백제문화제에서 백제 의자왕의 딸 '계산공주 이야기'가 전국에 소개된다. 사진은 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한 장면.

나는 백제의 공주이자 의자왕의 딸 계산이다. 나는 오늘도 칼을 차고 전장에 나선다. 싸우고자 함이 아니라 싸움을 막고자 함이다.

나는 오늘도 부왕의 뜻을 거스른다.

이웃나라 낙랑공주와 평강공주, 선화공주가 꽃처럼 살았지만 나는 그러기 싫었다.

낙랑은 사랑 때문에 나라를 팔았고, 평강은 바보에게 시집갔고, 선화는 근본을 모르는 남자의 품에 인생을 맡겼다.

나는 그러기 싫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의 삶은 꽃과 같지 않았다. 그들이 사랑했던 남자, 호동은 검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온달은 누가 쏜 줄도 모르는 화살에 생을 달리했다. 우리 백제로 시집온 공주는 미륵사가 준공될 무렵 생사를 알수 없게 됐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는다. 정(情)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가름하는가(問世間 情爲何物 直敎生死相許)"

오늘도 나는 전장으로 나선다. 남해의 신니(神尼)께 배운 선술(仙術)과 무예로 전쟁을 막고자 함이다.

선술로 변한 몸은 까치다. 땅에서 두 발을 모으고 펄쩍 뛰어 오르면 까맣고 둥근 날개가 겨드랑이에서 펄럭인다.

이웃 섬 왜국의 여왕 사이메이(齊明)가 어느날 내 모습을 보더니 '승리(かち.勝ち)'라고 했다.

까치(かち)는 나의 별칭이다. 시조 할머니 소서노(召西奴)의 별칭인 '오녀(烏女)'의 꿈에 다가선듯 기쁘다.

저멀리 웅진강 어귀에 당(唐)군의 대총관 소정방이 보인다. 천하무적의 자용병기(自勇兵器)가 요란하게 울부짖는다. 

살기가 가득한 자용병기를 가까스로 달래고, 조용히 소정방의 장군기에 앉았다.

산둥반도에서 백제해를 건너 온 당군의 수가 13만이다. 

소정방의 눈길은 줄곧 황산벌을 향해 있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날이다. 계백 장군의 5천 기병은 어찌 됐을까?

소정방의 시선 끝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말발굽 소리와 거대한 함성이 귓속을 파고든다. 달갑지 않은 소리다. '툭'하고 눈물이 떨어진다. 계백이 졌구나.

나도 모르게 목놓아 울었다. 한동안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내 울음에 당군이 몹시 놀란다. 장군기에 앉아 '끅끅끅' 우는 소리에 잔뜩 겁을 먹었다.

당군이 외친다. 반드시 원수(元帥)가 상할 것이라며 두려움에 떤다.

정방도 겁에 질려 군사를 물리라고 연신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 자가 왔다. 김유신. 신라의 상대등이다.

정방이 유신에게 호통을 친다. 집결지인 이곳에 제때에 오지 않았다며 화를 낸다. 유신 휘하 장수의 목을 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당장 독군(督軍) 김문영의 목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친다.

유신이 발끈하며 백제군의 결사대와 악전고투한 정황을 고(告)한다. 번쩍 치켜 든 그의 손에 달솔(達率) 계백의 수급(首級)이 들렸다.

눈도 감지 못한 그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끅 끅 끅' 울음이 멈추지 않는다.

나의 울음 소리에 당군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유신에게 호통치던 정방은 손에 든 등편(藤鞭)까지 떨어뜨렸다.

유신이 나를 올려 본다. 기이하게 바라보던 눈이 점점 노기(怒氣)로 가득찬다.

그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든다. 신검(神劍)이다. 

자용병기가 부르르 몸을 떤다. 한쌍의 도(刀)과 궁(弓)이 유신의 검과 자웅을 겨루고 싶어 안달이다.

한 차례 칼날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승패를 알 수 있겠지.

자용병기를 양 손에 들고 유신과 정방의 앞에 몸을 드러냈다. 강렬한 태양빛이 검끝에 흔들린다. 하늘이 푸르다.

승자는 누구이며 패자는 누구인지 하늘은 어찌 알까?

푸른 하늘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을까?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신라와 화평하자고 부왕에게 애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신의 눈은 살기가 넘친다. 화친은 없겠구나.

달솔 계백도 그에게 베였다. 좌평(佐平) 충상과 상영 등 제장들은 오라줄에 묶여 무릎 꿇고 있다.

나라의 존망이 풍전등화(風前燈火)다. 고마강(錦江)의 물결에 붉게 노을이 물들고, 사비(泗沘)도성으로 해가 저문다.

유신을 보았다. 호걸의 마음에 다시 지는 노을이 머문다.

유신에게 말했다. 만물은 웃기를 좋아하고 속세의 영예를 싫어하니 서로 군사를 물리는 게 어떻소.

사나이는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 

너의 부왕이 대야성에서 내 외손녀 부부를 무참히 살육하고, 끊임없이 신라의 강역을 노략했는데 이제와서 무슨 소리인가. 화의 근원인 백제를 멸하고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화친은 틀렸구나.
  
허명(虛名)뿐인 까치(かち)로 몸을 바꿔 부왕이 계신 도성으로 향했다.

충남 공주의 백제도성 '공산성'에서 뛰노는 까치 한쌍.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제공.
충남 공주의 백제도성 '공산성'에서 뛰노는 까치 한쌍.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제공.

부왕 앞에 엎드려 읍(泣)했다. 부디 신라와 화목하소서.

군대부인 은고(恩古)가 부왕의 앞을 막는다. 어머니 왕후를 폐비로 만들고 융 오라버니를 폐태자시킨 여인이다.

부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였다. 웅용유담결(雄勇有膽決)한 분이었다. 빼어나게 용맹하고, 굳센 담력과 결단력이 넘쳤다. 태평성대는 '증민의 치(曾閔之治)'였다. 요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를 믿었으며, 형벌은 오히려 충신에게 내렸다. 요녀의 무도로 국사를 멋대로 주무르고, 어진 신하들을 주살한 까닭에 화를 불렀다.

아버지, 신라와 화평하고 당을 물리쳐야 합니다.

은고와 좌평 임자가 말을 막는다. 도성의 병력이 잘 보전돼 있으니 험절한 웅진성에서 버티면 고구려와 왜가 구원군을 보낼 겁니다. 시간은 우리 백제의 편이지요.

모든 게 끝났다. 아무도 나의 편이 아니다.

두 손에 자용병기를 쥐었다. 도(刀)로 궁(弓)을 때렸다. 순간 낙뢰가 하늘을 가른다. 자용병기가 으르렁거리다 산산이 부서진다.

사비도성으로 신라와 당의 대군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왔다.

나라는 패망했고, 부왕과 은고, 동생 융, 좌평 천복 등이 당으로 끌려갔다.

수많은 예고가 있었다.

부왕 즉위 20년(660년) 봄 2월에 소부리(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천(백마강)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4월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소부리의 백성들이 이유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엔 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 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소부리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부왕이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석자 가량 땅 밑에서 거북 한마리가 나왔다. 거북의 등에 백제는 보름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는 글이 있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보름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고 하였다.

부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그 때 누군가 말했다. 보름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나라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부왕께서 몹시 기뻐하셨다.

남쪽의 영산 무오산은 오늘도 쓸쓸하다. 나는 백제의 공주, 계산(桂山)이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에 있는 계백장군 동상
충남 논산시 부적면에 있는 계백장군 동상

 

*본 기사는 충남지역 주요축제를 홍보하는 캠페인으로 충남도청의 지원으로 제작됐습니다. <삼국유사>와 <동경잡기> 등에 짤막하게 소개된 백제공주 '계산'을 올해 제68회 백제문화제에서 소개하기 위해 모놀로그 형식으로 쓴 창작물입니다. 일부 구절은 소설가 진융(金庸)의 작품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