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학창시절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남다른 탄생과 고난과 시련, 이를 극복하는 비범한 능력, 그리고 사회적인 성공으로 이어지는 보편적인 서사구조는 자연스럽게 감정이입된다. 이번 ‘명사의 학창시절’의 주인공은 김인식 대전광역시사회서비스원장이다.<편집자 주>

미국의 유명 매체 포브스(Forbes)는 지난 2021년 여성 성공을 위한 커뮤니티 <노우 유어 밸류(Know Your Value)>와 공동으로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50세 이상 여성 50명을 선정해 명단을 공개했다.
주목할 점은 선정 기준이다. 당연하게도 여성이어야 하며, 자신의 인생 경험을 밑거름 삼아 50세 이후 인생 최고의 성공을 거둔 여성을 선택했다. 역경을 극복한 에피소드는 가산점이 됐다.
마지막 기준은 영향력과 소명의식이다. 포브스는 영향력 보다 소명의식에 무게를 뒀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목적의식이 없으면 아무리 영향력이 커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후보들을 추리다 보니 레인메이커(기업 CEO, 유력 사모펀드 운영자 등), 비전을 가진 지도자(기술 기업가 또는 예술가), 체인지메이커(정치인, 사회적 기업가 등)라는 세가지 카테고리가 형성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최종 50인 안에 든 여성들의 업적은 눈부셨다.
56세의 나이에 여성으로서, 흑인으로서,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미국 부통령이 된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를 비롯해 53세에 미국 최대 은행 중 하나인 씨티그룹 최초의 여성 CEO가 된 제인 프레이저, 52세에 메이저리그 야구팀을 운영하는 최초의 여성이 된 마이애미 말린스(Miami Marlins)의 킴 응(Kim Ng) 단장 등 쟁쟁한 여걸들이 이름을 올렸다.
범위를 좁혀 보자. 과연 대전에는 어떤 인물이 포브스의 기준에 걸맞는 '50세 이상 성공한 여성'으로 선정될 수 있을까?
카테고리마다 내로라하는 여성들이 있겠지만 아마도 세번째 체인지메이커 분야에서는 단연 김인식 대전시사회서비스원장을 빼놓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린이집 원장을 하다 직능 비례대표로 제5대 대전시의원(2006년)이 된 후 내리 4선에 성공한 여성 정치인이다. 단순히 시의원 4선이어서가 아니다.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에서 민주당 최초로 광역의원 공천을 받아 당선된 여성 정치인이고, 대전지역 여성 최다선 시의원이고, 전국 광역시도의회 최초로 여성 의장에 선출됐다.
민주당 여성정치협의회(민여협) 소속 600여 명의 광역.기초의원들이 직접 뽑은 최초의 지방, 여성 회장이면서 대전시의회 의장 시절에는 17개 시도 광역의장단협의회 최초로 지방에서, 여성이 사무총장을 맡는 정치력을 선보였다.
과연 어떤 삶의 궤적이 김인식 대전사회서비스원장을 '초(初)의 여인'으로 만들었을까?
답변은 명쾌했다. 그녀의 학창시절에 답이 있었다.

# 하루 아침에 시작된 셋방살이, 일찍 철이 들다
김인식 원장이 나고 자란 곳은 대전 동구다. 대동에서 태어나 신안동 일대에서 한밭여중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마음이 아파요. 자주 전학을 다니고 셋방을 전전했거든요. 대동에서 신안동, 삼성동 등을 전전하면서 자양초등학교, 삼성초등학교, 현암초등학교까지 초등학교만 3군데를 다녔어요. 9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바람에 제가 현암초 1회 졸업생입니다. 왜 자주 이사했겠어요? 가난했으니까요. 늘 삭월세방을 찾아 다녔는데 딸 여덟에 아들 하나 있는 대가족이라 선뜻 받아주는 곳도 없었어요. 일곱 식구라고 거짓말을 하고, 밤에 몰래 나머지 식구들이 들어간 기억이 납니다. 1년에 두번 이사한 적도 있고, 늘 이사 준비가 돼 있었죠."
김인식 원장은 1957년생이다. 고희(古稀)가 낼 모레인 그녀의 초등학교 시절은 대한민국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1960년대다. 누구나 빈곤했던 시절, 가난이 남달랐던 건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한 순간에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잘 살았어요. 아버지가 베어링 기계 사업을 했으니 엘리트였죠. 어머니도 일본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었어요. 그런데 한 순간에 기와집에서 대동 다리 밑에 천막을 치고 살게 된 거예요.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지금도 눈물이 나는 것은 배고픔 보다 너무 너무 고왔던 어머니가 고생했던 모습 때문입니다."
김 원장은 어머니 송인희 여사를 떠올리다 울컥했다. 복받치는 눈물을 겨우 닦아낸 뒤에야 말을 이어갔다.
"대전에서 은진송씨하면 알아 주잖아요. 좋은 집안 출신에다 공부도 일본에서 하셨어요. 어머니 학창시절 사진 중에 세라복을 입고, 머리 땋은 여고생 사진이 있는데 너무 곱고, 세련미 넘치는 신여성입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한 뒤에 어머니가 노점을 하셨어요. 그 당시 노점은 돈을 뜯는 패거리도 있고, 관공서에서 철거하러 오면 늘상 도망 다니는게 일이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우리 식구를 어머니가 건사하셨어요."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을 두루 경험한 탓에 김인식 원장은 일찍 철이 들었다.
"내가 좀 당찼어요. 노점에 돈을 뜯으러 온 깡패에게 대들 정도로 거칠었죠."
'정치인 김인식'을 언급할 때 여성이지만 거침없고, 와일드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반전 여운이 짙었다.
"무작정 엄마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춘기 시절 내내 거칠었지만 삐뚤어지지 않은 것은 자식들에게 단 한 번도 큰 소리 치지 않았던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요. 본인들이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들이거든요. 가난했지만 가족애라는 것을 느끼면서 자란 것이 저에게 가장 큰 행운이었어요."
사실 그렇다. 히피와 폭주족들의 영화 <이지 라이더(Easy Rider)>의 주제가인 '본 투 비 와일드(Born to be wild)' 조차도 "세상을 우리의 사랑스런 포옹으로 감싸고, 우리의 엔진 굉음을 모두 한 번에 쏘아서 공중에서 터지게 해요"라는 구절이 있다.
'사랑'이야 말로 빈곤과 질풍노도 조차 쉽게 상처 줄 수 없는 절대언어(absolute language)다.

# 소중한 멘토들, 나의 선생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 때문에 곁에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멘토는 10대 청소년들의 학습과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김인식 원장은 학창시절 또 하나의 행운으로 훌륭한 학교 선생님들과의 만남을 꼽았다.
"너무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그중에서 방겸순 선생님과 임기창 선생님, 권순자 선생님은 잊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방겸순 선생님은 한밭여중 교장이셨다. 부자든 가난한 아이든 차별없이 특기가 있는 학생에게 엄청난 칭찬과 격려를 해줬다고 한다.
"당시 제가 규율부였는데 노래를 좀 했어요. 콩쿨 대회에도 나갈 정도였죠. 방겸순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의 재능 하나하나에 과분한 칭찬을 하셨어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 들 정도였죠. 또 학생을 꾸짖을 때는 먼저 칭찬부터 하셨어요. 저는 어렸지만 그걸 배웠습니다. 여성 정치인으로 때론 '파쇼'라는 말을 듣지만 종국에는 따뜻한 리더십이었다는 말을 들을 때 방겸순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기창 선생님은 음악을 가르치셨다. 사춘기 시절 기댈 곳 없던 소녀에게 음악은 유일한 친구였다.
"성악을 배우고, 콩쿨에 나갈 수 있도록 성심껏 지도해주셨어요. 제가 배우는 것에 욕심이 많아서 지휘도 가르쳐 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선생님은 현재 노인회장을 하고 계세요. 스승의날에 찾아 뵙겠다고 얼마전 통화를 했습니다."
권순자 선생님과의 일화는 가장 특별하다. 가난이 부끄럽지 않음을 일깨워준 분이기 때문이다.
"대전역 앞 철도병원 맞은편에서 어머니가 노점을 할 때였어요. 고추를 파는 걸 돕고 있었는데 멀리서 선생님이 오시는 게 보이더라구요. 순간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지만 차라리 인사를 깍듯하게 드리면 우리 물건을 사주실 것 같아서 큰 소리로 인사를 드렸어요.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마대 채로 20근 넘게 사 가시더라구요. 다음날 학교에 등교하니까 선생님께서 네가 성악과 웅변을 해서 못 사는 줄 몰랐다며 어제 만난 일을 말해도 되느냐고 묻더라구요. 그리고는 수업 시간에 반 친구들에게 방과후에 엄마를 돕는 훌륭한 아이라고 칭찬을 하시면서 너의 당당함이 좋았다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감사한 기억입니다."

#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웅변'
김인식 원장은 은근 '자랑꾼'이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초등학교때 투포환과 달리기, 높이뛰기, 기계체조 등 스포츠 만능이었다고 자랑한다. 또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뭐든 다 잘했다고 너스레를 놓는다.
"전국체전도 나갔어요. 당시 체육시간에 트렁크를 입었는데 높이뛰기 하면 남자애들이 쫓아 다니면서 팬티 봤다고 놀리고 그럴 때였죠. 활발하고 특기 많고, 전국체전에서 상 타오고, 동요대회에서 상 타오는 그런 학생이었답니다."
'재능 부자' 김인식 원장에게 가장 특별했던 특기는 '웅변'이다. 웅변은 그녀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키워드다.
"국민의힘 고문을 하신 이현성 선생님이 저의 웅변 선생님입니다. 초등학교 때 웅변 대회에 자주 도전했는데 자연스럽게 전문가와 만나게 된거죠. 초등학생 때는 웅변 원고를 학생이 직접 씁니다. 외할아버지가 광산업을 한 덕분에 어머니가 일본에서 전문대까지 나오셨어요. 어머니 도움이 컸죠. 하지만 중.고등학교부터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현성 선생님의 지도 아래에서 전국의 웬만한 웅변대회는 다 휩쓸었어요."

김인식 원장은 열여덟살이 되던 해인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대전 소재 광명실업전수학교를 다녔다. 웅변특기생이 되면 직장을 얻을 수도, 대학에 갈 수도 있다는 말에 입학을 결정했다. 가난한 고학생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친언니가 버스 안내양을 했어요. 못 배우면 기죽어 살아야 하는 시대였고,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못 됐어요. 중학교 졸업이라도 다행이라고 진학을 포기했을 때 이현성 선생님이 웅변으로 장학금 주는 학교가 있다며 소개를 하셨어요."
실제로 이 학교에서 김인식 원장은 웅변으로 날개를 펼쳤다. 전국대회를 다 휩쓸며 학교 장학금을 독차지했다. 요즘으로 치면 '고등래퍼' 급의 실력을 뽐냈다.
"전교생이 360명 남짓한 고등학교였어요. 웅변대회에 나가면 회당 2만원을 줬어요. 당시로는 엄청난 돈입니다. 자장면이 몇 백원 할 때예요. 서울대회는 3만원을 주는데 식대와 교통비를 빼도 큰 돈이 남았어요. 7분 짜리 원고지 열두장을 다 외워서 출전했어요. 원고를 읽으면 감점이거든요. 매번 상을 탔고, 장관상까지 석권했죠. 경희대 2박3일 전국 고교웅변대회에서 1등을 한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경희대 캠퍼스가 너무 아름다웠고, 나도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할 정도였어요."

당시만 해도 대학에서 웅변특기 장학생을 뽑을 때다.
"동국대와 원광대에서 웅변특기 장학생을 뽑았어요. 결국은 다른 친구가 합격했고, 저는 학교 인근의 금남산업주식회사라는 곳에 취업했어요. 여기 대표가 웅변대회 대회장을 했는데 제가 1등을 했다고 뽑아줬어요. 취업을 했어도 교복을 입고 꼬질꼬질하게 다니니까 대표님이 옷 좀 사입으라고 돈을 쥐어 주셨어요. 가엾게 보였던 거죠."
취업을 했지만 웅변의 매력을 떨치지 못했다. 김인식 원장은 1년 정도 회사를 다니다가 이현성 선생님과 함께 동구 정동 한약방 골목에 '동심언어문화연구원'이라는 웅변학원을 차린다.
"당시에 저는 출장 교육을 맡았어요. 나중에 단독으로 운영하면서 언어문화연구원을 교습소, 학원으로 발전시켰어요. 아마 웅변학원은 대전 1호나 2호쯤 될 것 같습니다. 웅변을 하고, 업으로 삼으면서 논리적 사고가 생긴 것 같아요. 웅변 원고가 서론, 본론, 결론이 딱 떨어지는 스타일이잖아요. 나중에 정치를 하게 된 원동력도 웅변의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았던 특기 중에서 웅변은 가장 특별하게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거죠."

# 학창시절의 꿈, 하루라도 빨리 '가장'이 되고 싶었다
김인식 원장의 학창시절은 각박했다. 늘 먹고 사는 것을 걱정했다. 중학교 수학여행도 못갔다. 학교 친구도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대신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드리겠다는 생각이 김인식 원장을 일찌감치 '소녀가장'이 되도록 떠밀었다.
"저는 넷째였지만 스스로 장녀가 되려고 발버둥쳤어요. 먹고 사는 문제로 다들 배움이 짧았거든요.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다짐을 했어요. 동생들 만이라도 내가 다 가르치고, 시집 보내자고. 제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밑에 동생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시키고, 더 밑에 동생들은 인문계고교에 진학시켰어요. 저는 요즘 행복합니다. 존경받는 언니가 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없이 살아도 천덕꾸러기로 자란 사람과 가족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은 얼굴이 달라요. 저의 현재는 친구들과의 유대 보다 가족 안에서 생긴 사회성이 책임감으로 발현된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노점 하는 어머니가 겪는 어려움과 못 배운 자매들이 맞닥뜨린 억울함을 체험한 것이 훗날 정치인으로서 사회적 약자들을 돌아볼 줄 아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김인식 원장은 정치에 입문하기 전 수많은 봉사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됐고, 대전에 야간대학이 없어서 청주에 있는 주성대(현 충북보건과학대) 청소년문화복지과를 다녔다.
"대전시의회 의정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이나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조례를 만들고 다듬는데 누구보다 앞장 섰어요. 제5대 대전시사회서비스원장에 취임하면서 돌봄 강화와 장기요양 종사자 처우개선 등을 약속한 것도 소녀가장에서 시작한 저의 남다른 가족사랑이 확장된 거라고 생각합니다.(웃음)"


#문제의 광명실업전수학교, 46년 만의 고교 졸업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의 책 <남자의 물건>에는 묘한 제목의 챕터가 있다. '진짜 무서운 건 늙은 수컷들의 질투다!'
일찍 가장이 되고 싶었던 '소녀가장 김인식'의 학창시절은 왠걸 고교 졸업 이후 46년이나 이어졌다.
만학도라서 늦깎이 공부를 한 거냐고 반문하겠지만 실상은 지난 2019년 제8대 대전시의원 시절 교육부로부터 46년 전의 고졸 학력 시비가 불거지면서 하루 아침에 중졸이 된 것.
교육부는 김인식 원장이 졸업한 광명실업전수학교(1985년 폐교)를 정규 고교 과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후의 주성대 전문학사 학위가 취소됐고, 한밭대(학사), 충남대 행정대학원(석사), 충남대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까지 줄줄이 취소됐다.
학력 취소가 결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두 달이었다. 증빙자료를 받아 대학에 정상적으로 입학했다는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당인 문재인 정부 시절이었고, 당시 터졌던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비리 사건이 기나긴 법정 다툼을 한 것에 비하면 번갯불에 콩 볶는 속도였다.
때문에 지방선거 공천과정에서 당내 세력들이 여성 정치인의 날개를 꺾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대학에 입학하려고 서류를 위조하지도 않았는데 학력 취소가 웬말이냐, 중앙당에 '잘 부탁한다'는 청탁을 안 해서 괘씸죄에 걸린거냐 는 등 말들이 터져나왔다.
"2019년 갑자기 고교 학력이 취소된 이후 삶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에 한동안 방황했어요. 하지만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판단해 고교 과정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죠. 권력에 가까운 인물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힘없는 지방의원에는 가혹할 만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으니 보란듯이 일어서고 싶었어요."
4선 시의원 말미였다. 고졸학력 미인정 통보를 받은 지 꼬박 1년 뒤 3월 김인식 원장은 대전시 산하 평생교육진흥원이 운영하는 2년제 교육기관인 대전시립중고등학교(야간과정)에 입학했다. 그리고 주경야독 끝에 2년만인 지난 2023년 2월 졸업장을 받았다.
"그 학교가 정식학교인지 국가기록원에 가서 봤어요. 분명히 학교군으로 당시에 분류돼 있었습니다. 학교 내부 사정을 가난한 고학생이 어떻게 압니까? 웅변 특기생이었고, 자유총연맹에서 궐기대회 청소년대표까지 했어요. 정식 고교생이 아니면 어떻게 그런 활동을 했겠어요. 당시 반공연맹대회에서 했던 웅변 내용이 생각나네요. '제3탄. 제1탄은 오발이었습니다. 제2탄은 명중했습니다. 제3탄의 탄알은 어디를 향할 지 모릅니다."
한마디로 늙은 수컷들의 질투를 엄청난 향학열로 이겨낸 셈이다.
"오히려 고졸학력 취소가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어요. 많은 분들이 저를 응원해 주시고 있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든든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도전을 통해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림자처럼 지내는 모든 분들께서 용기와 희망을 갖길 바랍니다. 80대에 배움의 길에 들어선 분들도 있는데 60대 후반은 청춘이잖아요."
그야말로 체인지메이커(changemaker) 다운 일성(一聲)이다.


# 김인식의 자녀교육, "정직한 생각, 말, 그리고 행동"
교육은 되물림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DNA처럼 시나브로 스며든다. 그래서 가정 교육이 중요하다.
김인식 원장의 좌우명은 '정직한 생각, 정직한 말, 정직한 행동'이다.
"인생을 돌이켜 보면 힘들 때 종종 남의 것을 탐낸 적이 있어요.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은 늘 그런 갈등을 거듭합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그래서 '정직'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품어온 생각이기도 하죠. 그래서 가훈처럼 제 아이들에게도 심어줬어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엄마처럼 책임감 있는 모습을 갖춰 달라고 소망했어요. 덕분에 10년 터울 아들과 딸이 잘 자라준 것 같아서 대견스럽습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정직한 생각과 말, 행동이 씨앗이 되어 아이부터 노인까지, 시민 모두가 행복한 복지서비스를 누리는 행복한 대전을 만드는 대전시사회서비스원에서 열매를 맺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