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사히신문 '매헌 윤봉길 의사' 재조명... 한일 외교경색 푸는 열쇠될까?
일본 아사히신문 '매헌 윤봉길 의사' 재조명... 한일 외교경색 푸는 열쇠될까?
  • 권성하 기자
  • 승인 2020.09.0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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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3일자 '호쿠리쿠탐방(北陸探訪)' 코너에 게재
가나자와시 윤봉길 의사 비석 건립에 전국 모금운동 언급
㈔매헌윤봉길월진회는 일본 현지에서 발행된 아사히신문의 8월 23일자 기사를 소개했다. 해당 기사는 윤봉길 의사의 독립활동과 가나자와시에서 사형 당한 뒤 추모비 건립과정에서 재일교포사회와 일본의 양심있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전국 모금 운동을 펼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매헌윤봉길월진회는 일본 현지에서 발행된 아사히신문의 8월 23일자 기사를 소개했다. 해당 기사는 윤봉길 의사의 독립활동과 가나자와시에서 사형 당한 뒤 추모비 건립과정에서 재일교포사회와 일본의 양심있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전국 모금 운동을 펼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지난 8월 23일자에 매헌 윤봉길 의사의 독립운동과 가나자와시에 건립된 윤 의사 추모비석 건립 당시 일본 전역에서 모금운동이 있었던 사실을 게재해 주목된다.

이번 보도가 한·일 양국의 엉켜버린 외교를 푸는 민간 외교의 단초가 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1일 ㈔매헌윤봉길월진회는 지난 8월 23일 아사히신문이 '호쿠리쿠탐방(北陸探訪)'이라는 코너에 게재한 내용을 전했다.

㈔매헌윤봉길월진회 측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일본 내에서도 양심적인 시민사회단체의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았다.

아사히신문에서 전체 지면의 4분의 1 정도를 할애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내용과 함께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인 가나자와시에 건립된 추모비가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세웠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린 것 자체가 고무적이라는 반응이다.

㈔매헌윤봉길월진회 김상희 대전지회장은 "매헌 윤봉길 의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상해의거를 통해 가라앉았던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일깨웠으며 중국 정부로부터 상해임시정부가 세계적인 공인을 받게 하는 일대 사건의 주인공이었다"며 "일본 정부의 충격이 어느 정도 컸는지는 윤 의사에 대한 재판도 없이 사형을 집행하고, 가나자와시의 공병대 쓰레기장에 암매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의 해당 지면에는 '묻혀버린 역사 논의를 거듭하며 새겼다'는 제목 아래 '조선독립운동가‧윤봉길비석(가나자와시)', '감정 극복, 전국에서 모금' 등의 부제목이 달려있다. 아래는 아사히신문 당일 기사 번역 및 재구성이다.

"전쟁에 패한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 도쿄만상의 미국 전함 미주리 갑판에서, 오른발이 없는 시게미츠 마모루 외상은 지팡이를 짚고 나아가, 정부 대표로서 서명했다. 그 다리를 폭탄으로 빼앗은 조선독립운동가 윤봉길의 비석이 가나자와에 있다. 무슨 사연이 있어 생겨났을까. 관계자를 방문했다."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오미쵸 시장 근처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야마구치 타카시씨(72)의 회상을 토대로 윤봉길의사 추모비가 건립된 30년 전으로 시계를 돌렸다.

"당시 오미쵸 시장 근처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가나자와 지문 모임'의 동료와 한 달에 1번은 모였다. 지문날인을 거부한 재일교포 학생들을 지원하는 시민운동인데 회원은 회사원과 연구자, 승려 등 20여명이었고, 재일교포도 5명 정도 있었다."

"정례회에 온 재일교포 1세 박인조씨가 1932년 중국에서 상해 천장절 폭탄사건을 일으킨 윤봉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독립을 노리는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일본 측 인사 2명이 사망했고, 주화공사였던 시게미츠 마모루가 오른발을 잃었고, 체포된 윤봉길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상해 파견군의 9사단 사령부가 있는 가나자와로 끌려가 총살됐다. 비밀리에 묻힌 유해는 1946년 재일동포들의 손으로 발굴돼 고국으로 송환됐다."

회상을 이어가던 야마구치씨는 당시에 '아무도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했다.

"학습회를 시작하고, 윤봉길이 13년간 묻혀 있던 노다 산 현장도 보러 갔는데 깜짝 놀랐다. 그곳은 드넓은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 절벽 아래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길 한가운데였다. 이 역사를 어둠에 파묻혀서는 안 된다. 야마구치씨는 시민단체와 가톨릭단체들과 '윤봉길 암장터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어, 보존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다만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고, 주변에 설명하면 '폭탄을 던진 테러리스트잖아, 동정은 하지만 폭력은 긍정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모임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의가 이어졌다. 일본인들끼리, 그리고 재일동포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렸다. 가장 큰 문제가 비석에 새기는 윤봉길의 칭호였다. 박인조씨는 침략에 저항하는 의거를 이루었으니 '의사'라고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그렇다면 그만두겠다고 빠진 사람이 있었다."

같은 멤버였던 후루하타 토오루 카나자와대학 국제학류장의 증언이다.

후루하타씨도 처음에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농촌 출신의 윤봉길은 농업 개량으로 사람들의 생활 향상을 목표로 한 지식인이었고, 일본의 침략으로 어려워지면서 식민지 지배 자체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목숨을 건 인간의 저항을 '테러'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식민지 지배에 반대한다면 저항운동도 모두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에 일치된 결론이었다. 전국 500여명에게서 온 성금은 220만엔이었다. 처형된지 꼭 60년 만인 1992년 12월 19일에 공개된 비석에는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이라고 새겨졌다."

"그로부터 약 30년 지났다. 올해 7월 하순 비석 앞에서 박현택씨(76)를 만났다. 2009년 82세로 작고한 박인조씨의 조카로 대리운전사를 운영하고 현역으로 일한다. 마치 묘지기처럼 비를 돌보던 박인조씨는 방문객들을 안내하며 윤봉길의 생애를 열렬히 이야기했다. 그의 열의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묻자, 의외의 사실을 말해 줬다. 자신도 전쟁 중에는 실은 황국 소년으로, 소년 비행군에 지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24세에 정반대의 삶을 마감한 윤봉길을 알고 난 후 참회와 비슷한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다고."

후루하타씨는 지금의 한일관계가 냉각돼 있기만 하다고 당시와 비교했다.

"우리는 그때 제대로 논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어느 쪽에도 있는 내셔널리즘의 감정을 서로 억제하면서 어떻게 하면 미래로 연결시킬지를 생각하면서 나아가야 할 때다."

야마구치씨는 처형 당시의 카나자와 헌병대장이 쓴 보고서를 입수했고, 조선인 좌익분자들에게 시체를 탈환 당할까봐 극비리에 급하게 묻었다는 것을 알고 관련 내용을 책에 썼다.

사실을 대하는 그 자세 때문에 어느 재일교포 1세로부터 윤봉길을 영웅으로 일컫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그를 영웅으로 일컫는 것은 절대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일본인들은 '천장절 폭탄 사건'이라고 말한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경축식에서 조선독립운동가 윤봉길(1908~32)이 폭탄을 던진 사건이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해 파견군 사령관 등 2명이 사망하고 중경상자도 여러 명 나왔다. 대한제국은 1910년 일본에 병합됐고 윤봉길은 상해로 망명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