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학창시절]유병국 충남도의회 의장
[명사의 학창시절]유병국 충남도의회 의장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10.1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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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信言不美, 美言不信)”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책 ‘노자의 재구성: 정치이념으로 본 도덕경’에서는 지도자의 도리로 해석한다.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 전하고자 한 것이 이상적인 세계와 바른 통치이념, 온전한 정의에 대한 고민이라는 것이다. 종점은 조화로운 대동(大同) 사회의 완성이다.

마침 그런 길을 걷는 이가 있다. 오십, 지천명(知天命)에 제10대 충남도의회 의장에 오른 유병국 의장이다. 외모부터 넉넉하다. 서산 마애삼존불의 웃음기를 담은 얼굴이며 내서니엘 호손의 ‘큰바위얼굴’을 연상시키는 풍채는 정쟁보다는 모두 하나가 되는 ‘대동 사회'를 이끌 관상이다. 유 의장에게는 어떤 청소년기가 있었을까? 풀뿌리 지방의회를 이끌고 있는 유 의장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

유병국 충남도의회 의장은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의 보산원리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은 관광명소로 이름난 광덕산 자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남 4녀 중 막내인 유 의장의 어린 눈에도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빼꼼히 보이는 오지마을이다.

“보산원리는 광덕산 촛대봉 앞의 산촌 마을입니다. 그중에서도 용의 발톱으로 긁은듯한 계곡을 품었다는 용경(龍耕)마을이 제 고향입니다. 할아버지 대부터 이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으니 농사꾼의 아들인 셈이죠. 저도 여느 농가 자녀들처럼 컸어요. 농번기에는 당연히 농사일을 거들고, 소에 풀 먹이는 일이며 비에 볏단이 썩지 않도록 세워서 줄갈이치고, 비닐을 덮는 일도 다 해봤어요. 타작 전에 하는 줄갈이는 볏단을 일일이 손으로 묶어서 세워야 해서 어른들도 고된 일이었죠.”

유 의장은 광덕산 자락의 오지마을의 가난한 집이었지만 아름답고, 넉넉한 자연 풍광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이 지금의 정치 철학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핵심은 배려와 양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추억이 너무 많아요. 방과후엔 으레 풍서천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거나 고기를 잡았고, 겨울엔 썰매를 들고 신나게 놀았어요. 소를 먹일 풀을 베다가 땅벌집을 건드려서 몇 백 미터나 달아나며 혼줄이 난 기억도 있습니다.(웃음) 서른 가구 정도 사는 마을에 고만고만한 또래들과 많이도 싸우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고 놀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가끔 도회지에서 자랐으면 정치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오히려 작은 마을에서 갈등하고, 양보하고, 조정하는 것을 터득한 것이 더 큰 도움이 됐습니다.”

유 의장의 고향은 광덕산 자락에 있는 산촌마을이다. 또래 친구들과 온동네를 뛰어놀던 시절이 지금도 그립다.
유 의장의 고향은 광덕산 자락에 있는 산촌마을이다. 또래 친구들과 온동네를 뛰어놀던 시절이 지금도 그립다.

유 의장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핵가족과 도시화의 부작용인 이기주의도 다시 자연상태에서 회복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찌보면 자연 상태의 개인이 이를 벗어나 합의를 통해 공동의 규칙과 법을 받아 들여 정치 공동체를 결성한다고 주장한 존 로크의 ‘통치론’을 닮았다.

용경마을은 서른 가구에 불과하지만 상서로운 이름만큼 인물들을 배출했다. 광덕면 1호 박사도 이곳에서 나왔고, 국립대 교수도 나왔다. 대전발전연구원장을 지낸 유병로 한밭대 교수가 유 의장의 친형이다.

“제일 큰 누나와 15살 차이가 납니다. 형제들 중에서도 11살 위의 둘째 형인 유병로 교수는 친형 이상의 존재였어요. 솔선수범의 가치나 권한과 책임을 깨닫게 해 준 인생의 멘토였어요. 제가 학생 때 이미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형이고, 대학 전공을 법을 선택한 것도 형의 권유였습니다. 터울이 많이 나는 막내였기에 부모님보다는 누나와 형들이 고민 상담에 제격이었죠. 학창시절의 시행착오와 정치 입문 과정에서 형제들의 조언은 늘 금과옥조였습니다.”

학창시절은 누구나 그리움이다. 유 의장은 또래 친구들을 곧잘 이끌며 리더의 역할에 막연하지만 흥미를 가졌다.
학창시절은 누구나 그리움이다. 유 의장은 또래 친구들을 곧잘 이끌며 리더의 역할에 막연하지만 흥미를 가졌다.

유 의장은 또 한 분의 소중한 멘토를 떠올렸다. 천안북중학교 시절의 은사인 유희권 선생님이다.

“몇 년 전 작고하셨어요. 2학년과 3학년 때 담임이셨는데 제게 끊임없이 리더십을 강조하셨던 고마운 은사님입니다. 중학교에 진학했더니 모든 것이 용경마을과 하늘과 땅 차이였어요. 친구 집에 한번 놀러갔는데 TV에 피아노까지 있더라구요.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어요. 세상에 책이라고는 교과서만 있는 줄 알았던 제게 엄청난 문화충격이었어요. 한국전래동화 전집, 세계위인전집 등 어마어마했어요. 매일 그 친구 집에 놀러가서 책을 읽었죠. 친구 어머님께서 니 책을 쟤가 다 본다며 핀잔을 준적도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산원초등학교 시절 개구리 잡아먹고, 무 뽑아 먹던 아이가 얼마나 주눅이 들었겠어요.(웃음) 기죽어 있던 시골아이에게 힘을 북돋아 준 분이 유희권 선생님이셨어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 유 의장이 학급반장을 할 때다.

“청소시간에 친구들끼리 싸움이 벌어졌어요. 입 안이 찢어지고, 코피가 터질 정도로 유혈극이 벌어졌죠.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어요. 한 쪽 친구 집이 천안 유지였는데 온 가족이 몰려와 상대방 친구를 때리고, 교무실과 교실에서 난리를 부렸어요. 폭풍같은 시간이 지난 뒤 유희권 선생님은 반장인 저를 호되게 나무라셨어요. 봉걸레 자루로 스무대는 맞았어요. 너의 잘못은 아니지만 리더로서 책임감과 통솔력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대표로 혼을 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억울했지만 이 때 책임자라는 무거운 직책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유 선생님는 이후에도 저에게 지도자의 리더십과 자질, 권위에 대한 존중 등을 많이 강조하셨어요. 메모하는 습관의 중요성도 이때 체득했습니다. 조직을 통솔하고, 솔선수범하는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죠. 선생님 덕분에 고교에 진학한 뒤나 대학에서도 대표 역할을 곧잘 맡았고, 나름대로 잘 운영할 수 있었어요. 정치하는 유병국을 만든 고마운 은사님입니다.”

고교 시절 학교 성적은 빼어나지 않았지만 늘 사회현상에 호기심이 많았다. 훗날 법대에 진학하고, 정치인의 길을 걸은 것도 이 무렵 형성된 가치관의 영향이다.
고교 시절 학교 성적은 빼어나지 않았지만 늘 사회현상에 호기심이 많았다. 훗날 법대에 진학하고, 정치인의 길을 걸은 것도 이 무렵 형성된 가치관의 영향이다.

유 의장의 학창시절 성적은 어땠을까?

“천안중앙고에 진학했더니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더군요. 솔직하게 성적으로는 두각을 내지 못했어요. 성적 대신 학교 활동에 집중했어요. 당시 군사훈련을 하는 교련 과목이 있었는데 학도호국단 중대장과 연대장을 도맡아 했습니다. 학교의 활동에는 뭐든 적극 참여했어요. 요즘으로 치면 학생부종합전형 인재였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웃음) 사실 농사 짓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없었어요. 다만 공부 잘 하는 형, 누나들 덕분에 ‘저 집 아이들은 공부 좀 하지’라는 암묵적인 책임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적은 빼어나지 않았지만 호기심은 특출났다. 유 의장은 학창시절 내내 호기심의 허기를 채워 준 게 ‘신문’이었다고 말한다.

“신문은 매일 정치면, 사회면, 경제면, 과학면, 연예 가십면 등을 글로 배달해 주잖아요. 읽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저는 정치면, 사회종합면, 사설을 읽는 게 순서였어요. 다들 그렇게 읽는 줄 알았는데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더군요. 신문 경제면만 읽던 친구는 사업을 하더라구요. 문과를 선택하고, 법을 전공한 것도 신문 읽는 순서와 마찬가지였어요. 지금 정치를 하고 있는 것도 내재적인 잠재성이 있었던 거죠.”

고교생 유병국은 교련과목에서 중대장과 연대장을 도맡아 했다. 조직 속에서 역할을 해내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과 재미를 느꼈다.
고교생 유병국은 교련과목에서 중대장과 연대장을 도맡아 했다. 조직 속에서 역할을 해내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과 재미를 느꼈다.

법대 진학을 결심한 후 유 의장의 꿈은 사법고시 패스였다. 사람이 법 없이는 한 시도 살수 없으니 변호사가 돼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열정도 불태웠다. 청주대 대학원 석사논문도 ‘사용자 배상 책임에 관한 연구’다. 백화점에서 버려진 바나나 껍질을 밟고 사망한 고객의 배상책임을 청소부에게 일방적으로 물릴 수 없다는 사용주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논문이다. 하지만 세 번의 낙방 끝에 방향을 바꿨다. “능력이 안 됐다”는 것이 유 의장의 솔직한 답이다.

대신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마침 양승조 충남도지사가 천안 신부동에 변호사사무실을 열었고, 사무장을 뽑았다.

유 의장은 이때를 ‘인생의 일대 터닝포인트’라고 꼽았다. 인생의 세 번째 멘토와의 만남이고,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된 첫발이기 때문이다.

“변호사 시절의 양 지사님과 잠 잘 때 빼고는 늘 함께 했어요.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대개 법률사무소를 찾는 사람들은 억울한 사람들입니다. 양 지사는 늘 친절하라고 강조했어요. 또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하도록 들어주라고 신신당부했어요. 본인 역시 의뢰인들이 속이 시원하다면서 일어날 때까지 모든 사건 내용을 직접 듣고, 메모했어요. 그랬더니 승소를 하든, 패소를 하든 불만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저를 앉혀 놓고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양 지사의 생활 모습을 비켜보면서 아, 정치는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법조인의 마음가짐 등을 수 없이 많이 배웠습니다.”

법대를 졸업한뒤 사법시험에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미련을 떨치고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양승조 충남도지사와의 첫 만남이고, 정치인의 길을 걷는 첫발이었다.
법대를 졸업한뒤 사법시험에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미련을 떨치고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양승조 충남도지사와의 첫 만남이고, 정치인의 길을 걷는 첫발이었다.

유 의장은 또 하나의 ‘멘토’를 소개했다. 활자 마니아답게 그의 네 번째 멘토는 ‘책’이었다. 그는 ‘삼국지’와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권했다.

“중학교 때 친구 집에서 읽은 삼국지는 제 삶에 엄청난 영향을 줬어요. 단순한 전쟁소설이 아니었던거죠. 실제로 삼국지는 세상 살아가는 처세를 알게 한 책입니다.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의 이해관계를 다룬 정치서이기도 하죠. 고도의 심리싸움과 외교전은 지금도 정치를 하는 제게 소중한 참고서입니다.”

또 한 권의 책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인문학 독서를 통한 이타주의의 길을 안내하는 책이다.

“한국 사회에서 문송하다(문과라서 죄송하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무리 수학과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정상 1%의 리더들은 인문학을 사랑했고, 인문학과 철학으로 인류를 이끌어 왔습니다. 우리 충남과 전국의 청소년들이 이 책을 통해 체계적인 인문고전 독서에 도전해 보기를 권합니다.”

유 의장은 올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아들과 여고 2학년 딸을 뒀다. 가정교육의 벼리는 인간관계에서의 관용과 배려다. 그가 걸어온 삶이 고스란히 담긴 가르침이다.

“제 좌우명은 ‘열 가지 이로움을 얻는 것은 한 가지 해로움을 제거한 것만 못하다’입니다. 몽골인이 아니면서도 징기스칸이 가장 아낀 참모였고, 4대에 걸쳐 원 제국의 재상을 지낸 야율초재가 한 말입니다. 저는 많은 우군을 확보하기 보다는 한 사람의 적군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거창하게 탕평(蕩平)까지는 아니더라도 학창시절부터 키워 온 저의 소박한 정치 신념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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