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학창시절] 권진순 한복디자이너(권진순옛옷 대표)
[명사의 학창시절] 권진순 한복디자이너(권진순옛옷 대표)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7.11.2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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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유별난’ 학창시절이 있다. 대개 명사의 학창시절은 꿈과 끼를 마음껏 발휘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청소년들에게 귀감이면서 훌륭한 멘토의 ‘조언’이 된다. 유별남은 ‘특별함’과 같은 말이다. 권진순 한복 디자이너(58?권진순옛옷 대표)는 한복 한류를 이끌어 온 예술가다. 호서지역(대전?충청)을 대표했던 문인 아버지에게서 이어 받은 DNA가 권 디자이너의 삶에 독특한 문양을 남겼다. 그녀에게 수식어처럼 따라 붙는 ‘K패션’은 유별난 애국심으로도 읽힌다. 그래서 권진순 디자이너의 학창시절은 궁금하다. 그녀의 유년기와 소녀 시절을 들어봤다.

#아버지 권선근, 선비 소설가의 막내딸

‘당신은 이 고장 숯뱅이 의연한 선비였네./소설가 권선근 선생은 병인년에 나셔서 기해년에 가셨으니/육십 평생 요지경 같은 세상에서 허선생같이 살아간 의연한 선비여./당신은 촉촉한 들판의 봄비처럼/우리 모두의 가슴을 따스하게 적셔주었네.’

대전 둔산동 샘머리공원에 서 있는 권선근 소설가의 문학비 뒤편에 새겨진 헌시(獻詩)다. 권진순 디자이너의 아버지 권선근(1989년 작고)은 대전지역 소설문학의 선구적 인물이다. 1950년 <문예>지 3월호에 ‘허선생’이라는 작품을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게재하고, 1954년 4월호에 ‘요지경’을 신인작품으로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걸었다. 또 1960년부터 1971년까지 충남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협 충남지부 회장과 예총 충남지회 회장을 맡는 등 향토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시련이 닥쳤다. 1972년 충남예총 명의의 유신 지지성명을 반대하고 나서면서 정권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유신에 반대하니까 무능 교수로 낙인을 찍어서 학교에서 쫓아낸 거죠. 아버지는 명예 회복을 위해 2년 동안 재판을 해서 결국 승소판결을 받았어요. 하지만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대학에서 면직된 후 받은 연금과 퇴직금도 일체 받지 않고 국고에 귀속시켰어요. 그만큼 꼿꼿하신 선비였던 거죠.”

권진순 디자이너의 부친은 대전지역 소설문학을 이끌며 선비 문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권선근 작가다.
권진순 디자이너의 부친은 대전지역 소설문학을 이끌며 선비 문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권선근 작가다.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문학적 열정과 스승으로서 길을 걸었던 권선근. 그의 의연한 선비다운 풍모는 고스란히 막내딸인 권진순 디자이너에게 이어졌다.

프랑스와 헝가리, 중국, 몽골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K-FASHION’을 선보이며 고집스럽게 한복 한류를 이끌었고, 지난 2015년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시베리아에서 독일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1만 4400km의 유라시아 친선 특급 대장정에 참가해 열차 안에서 19박 20일 동안 참가자들의 통일 염원을 담은 천 조각 3000여개를 이어 붙인 대형 태극기(가로 9m?세로 6m)를 선보였다.

“어느 날 어머니(손남순 여사)가 여섯 남매 중에 네가 가장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시더라구요. 원래는 첫째 큰 언니가 대전에서 5등 안에 들 만큼 수재여서 이 언니가 가장 닮은 줄 알았는데 크면서 성격이나 가치관이 네가 가장 닮았어라고 하셨어요. 고집스럽게 한복 외길을 걷는 것도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다섯살 무렵 송촌동에서 찍은 사진
다섯살 무렵 송촌동에서 찍은 사진
백운초3학년때 독골에서 친구들과 함께. 독골은 현재의 도솔산이다.
백운초3학년때 독골에서 친구들과 함께. 독골은 현재의 도솔산이다.

#말이 없고, 고집 센 아이

권진순 디자이너는 유년 시절 말이 없는 아이였다. 오죽하면 “입에 거미줄 치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온 가족이 제가 바보인 줄 알았답니다. 그만큼 말수가 없었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선생님도 저를 바보로 아셨나봐요. 학기 초에 가정방문을 와서는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어떻게 해서든 잘 가르쳐보겠다고 하셨대요. 그런데 막상 시험을 보니 동그라미가 많았던거죠. 그제서야 잘못된 걸 아시고는 저희 집에 사과 방문을 오셨어요.(웃음)”

말은 적은 아이였지만 고집은 유별났다. 어느 날은 어머니에게 혼이 난 것이 억울해서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부모님 주무시는 머리맡에 서서 밤을 꼴딱 샜다. 기어코 사과를 받겠다는 심산이었다.

“부모님도 밤새 눈을 떴다 감았다 하시면서 저를 관찰하셨어요. 쟤 아직도 서 있네 하시는 목소리를 다 들었지만 동이 틀 때까지 서 있었죠. 7살 때였어요.”

백운초 6학년 발레부 활동 사진.
백운초 6학년 발레부 활동 사진.

#남 다른 손재주, 떡잎부터 달랐다

권진순 디자이너는 대전 탄방동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의 도산서원(탄방동 220-1번지) 일대의 탄방동과 둔산3동 일원이 할아버지 땅이었다고 기억한다.

“할아버지가 7살에 조실부모하셨는데 글은 모르지만 자수성가로 부농을 일궈내셨어요. 덕분에 어린 시절 배고픔을 모르고 살았지요.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자란 탓에 일찍부터 손으로 뭔가 만들기를 좋아했어요.”

백운초등학교 시절엔 종이인형의 옷을 입히는 놀이에 푹 빠졌다. 종이 옷인 탓에 몇 번 접었다 폈다하면 쉽게 찢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직접 옷을 그려서 입혔다. 지루하지 않게 계속 새로운 옷을 디자인해서 입혔는데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중2 사춘기 소녀시절 자주 올랐던 동산. 지금은 남선공원이 됐다.
중2 사춘기 소녀시절 자주 올랐던 동산. 지금은 남선공원이 됐다.
대전여고 동창들과 함께.
대전여고 동창들과 함께.

디자이너의 가능성은 호수돈여자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중2 가정 시간이었어요. 한지로 손바닥만 한 한복을 만드는 과제가 있었는데 왠지 시시하더라구요. 선생님께 저는 직접 천으로 만들겠다고 하고, 어머니 원단 보따리에서 본견을 몰래 꺼내서 아기 돌옷 사이즈의 삼회장저고리를 만들어 제출했어요. 선생님들이 깜짝 놀라셨죠. 그런데 재미난 것은 세월이 한참 흘러 제가 탄방동 충남고사거리에 한복점을 냈을 때예요. 아주머니들 몇 분이 들어오셔서 여기가 호수돈 나온 권진순이 하는 곳이냐면서, 그 당시 교무실에서 학생이 만든 게 맞느냐며 내기가 벌어졌다고 하더라구요. 호수돈여중의 다른 반 선생님들 이셨어요.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오랫동안 실컷 웃었습니다.”

남다른 미적 감각 덕분에 대전여고에 입학해서는 미술 선생님과 본의 아닌 숨바꼭질도 벌어졌다.

“대형 석고인 아리아스(Arias) 데생을 미술반 친구들보다 더 잘 해냈어요. 그러니 선생님이 미술을 전공하라고 줄기차게 설득하셨죠.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어요. 자신은 예술가였으면서 딸이 예술을 하는 것은 마뜩치 않았던 거죠. 결국 아버지 핑계를 댔더니 미술 선생님이 미술실 문을 밖에서 잠그셨어요. 재능있는 제자를 집에 보내고 싶지 않으셨던 거죠.”

권진순 디자이너는 숙명여대 의류학과를 졸업했다. 세계적인 한복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도 대학을 다니면서 키웠다. 하지만 전공 선택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우선 아버지가 반대했다.

“원래 이런 저런 것을 시키려고 하지 않고, 자유롭게 큰 틀의 도덕적 가치만 올바르면 무엇이든 후원하셨지만 이상하게 예술 분야는 반대했어요. 우여 곡절 끝에 가정대학(당시 의류학과는 가정대에 속했다)에 진학했어요.”

#세계적인 한복 디자이너, 아버지의 유산

권진순 디자이너에게 항상 따라 붙는 수식어는 ‘세계적인’이라는 말이다. 한복 한류를 이끌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복 패션쇼를 개최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른다. 천과 천을 바느질로 꿰어 엮는 것처럼 세계 속에 한복의 아름다움을 수놓는 작업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킹(networking)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세계적인’ 한복 디자이너로 우뚝 선 데는 남다른 가치관도 한몫했다.

“스스로 잘하는 것을 잘한다고 인지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디자이너를 선택할 때, 또 한복 분야를 개척할 때 정말 열악했어요. 양장이 훨씬 수준 높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과연 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나 싶었지만 과감하게 한복을 선택했습니다. 오히려 선점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계적인 한복 디자이너를 꿈꿨던 숙명여대 기숙사에서 작품을 만드는 모습
세계적인 한복 디자이너를 꿈꿨던 숙명여대 기숙사에서 작품을 만드는 모습

돌이켜 보면 더하기 빼기 잘하는 것, 공부 성적은 칭찬의 도구였을 뿐이란다. 결국 마음의 행복을 찾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갔고, 돈보다 더 큰 것을 얻었고, 설령 돈을 벌지 못했어도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문학의 길을 선비처럼 걸었던 아버지를 쏙 빼 닮았다. 후배 문인들의 말대로 요지경 같은 세상에서 허선생처럼 살다 가셨으니 부전여전(父傳女傳)인 셈이다.

“유라시아 친선 특급 대장정에서도 저는 고집스럽게 조각보를 이어갔어요. 함께 참여했던 사람들이 파티를 즐길 때도 바느질을 했어요. 오로지 태극기만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주최 측의 실수로 원단을 통째로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당시 어떤 기자가 왜 포기하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그만 두는 것도 나의 의지라고 했어요. 나중에 태극기가 완성되자 기자들이 저 만을 위한 5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주더군요. 진심은 언제나 통하더라구요.”

그녀가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이어 만든 대형 태극기는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권 디자이너의 자녀교육, “자존감을 키워라”

권진순 디자이너는 사람에 대한 욕심이 없다. 출세를 위해 인맥을 넓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신 자기 성장을 위한 채찍질에는 멈춤이 없다. 스스로에 대한 목표와 가치를 높이면 늘 당당하고, 잘날 때나 못날 때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다. 단편적인 교육 보다는 자존감과 가치관을 키우는 교육에 초점을 뒀다. 어떤 직업이나 진로를 결정할 지는 오롯이 자녀들의 몫이다. 때문에 큰딸(전지용)이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며 의류학과에 진학할 때도 묵묵하게 지켜봤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도록 해야지 결코 부모가 만들어 놓은 길로 가는 것은 행복하지 않을 겁니다. 특별한 멘토링을 하지 않아도 딸 아이 스스로 창의성과 대중성을 갖춘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권 디자이너는 자녀교육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칼릴 지브란의 시(詩) ‘결혼에 대하여’로 갈음했다.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중략)/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에선 자랄 수 없다.’

어머니와 딸과 함께 모녀 3대가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는 1년 전 작고하셨고, 딸 전지용씨는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어머니와 딸과 함께 모녀 3대가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는 13년 전 작고하셨고, 딸 전지용씨는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