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학창시절] 김명수 대전광역시 청소년활동진흥센터장
[명사의 학창시절] 김명수 대전광역시 청소년활동진흥센터장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6.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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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名士)’.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명사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훌륭한 롤모델이다. 그들이 어떤 청소년기를 겪었는지, 어떤 학창시절의 추억을 가졌는지는 세대를 뛰어 넘는 관심사다.

김명수 대전광역시청소년활동진흥센터장(60)은 반평생을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한 사회활동가다. 무려 22년 동안 청소년활동진흥을 위한 길을 걸었다.

청소년육성 유공자로 대통령표창(2011년)과 국무총리표창(1999년)을 수상했고, 전 한국청소년활동진흥센터협회장, 한국청소년학회 이사, 아노복지재단 이사, 수양원 이사, 평송장학회 이사 등 그를 수식하는 경력은 무궁무진하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에서 법대에 진학했던 김 센터장이 청소년활동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린 시절 꿈은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한 뒤로 줄곧 교단 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나중에 법대에 진학했지만 무의식 속에는 청소년들의 복지와 활동을 위한 운명적인 생각들이 자라고 있었다.

“영남대 법대에 진학했는데 남들 사법시험 공부할 때도 교사 자격증을 땄어요. 다들 돌연변이라고 수군거렸어요. 법대 와서 고시공부하지 않고, 선생 하겠다며 교생실습 다니니까 이상하게 보인 거죠. 법 학문이 맞지 않은 것도 아니었는데 자꾸만 교사의 길을 좇게 되더군요.”

애초에 사범대에 진학하지 그랬냐는 물음에는 ‘성적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고향 시골마을에서는 공부 좀 한다는 소릴 들었지만 도회지인 대구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고한다.

“중학교 마치고 대구로 유학을 갔어요. 경북 문경 산양면 평지리가 고향인데 공부 좀 한다는 소릴 들었죠. 산양중학교 때 전교 5등 이내였고, 반에서 1등도 곧잘 했어요. 대구 연합고사 2기였는데 전교 20등 안에 들어야 대구지역 고교 원서를 써줬어요. 1기때 우리 선배들 5명이 죄다 떨어진 탓이었죠. 우리는 10명이 지원해서 5명이 붙었어요. 학교에 경사가 났습니다. 국어 과장이던 이제운 선생님께서 수고했다고 꼭 끌어 안아주시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당시 연합고사 합격자들을 추첨을 했는데 저와 대구에서 세무사사무실 다니는 친구(김하식씨) 둘이 대구 계성고등학교에 입학(66회)했어요. 유도 김재엽 선수(70회)로 유명한 학교입니다. 당시에 720명 12개 반이었는데 배치고사 때 제가 498등, 친구가 499등 했어요. 요즘 말로 멘붕에 빠졌죠. 앞으로 우리 어떡하나, 대학은 가겠나 하는 절망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김 센터장은 당시 자신의 상태를 ‘기가 죽었다’고 기억했다. 중학교 때만해도 상위권이던 수학 실력이 곤두박질쳤고, 대학 진학에 대한 희망도 꺾였을 정도였다. 이때의 좌절감이 훗날 청소년들의 마음을 보듬고, 용기를 북돋는 일을 하도록 무의식에 깊은 인상을 새겼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수학 선생님이 다들 이 공식 알지, 하시면서 넘어가는데 손을 들고 질문할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시골 출신에 성적도 뒤쳐진 상태에서 모든 게 의기소침했어요. 대학 본고사 시절에는 한 과목이라도 0점이면 낙제였는데 수학은 겨우 1문제 맞아서 대학에 합격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왜 그렇게 기가 죽어 있었는지 아쉽기만 합니다. 용기 없던 제 모습들이 훗날 청소년활동에 뜻을 두게 된 이유인 것 같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생각을 제때 제대로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을 그때의 저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구 계성고 시절 김명수 센터장과 동기들.
대구 계성고 시절 김명수 센터장과 동기들.

가난도 김 센터장의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어릴 땐 몰랐지만 도시에서의 상대적 빈곤이 힘들었다.

“고향마을은 다들 가난했어요. 우리 집도 근근하게 살아가는 시골 살림이었어요. 배고픔이 다반사였죠. 항상 배가 고팠고, 밥을 먹어도 쌀밥 아닌 보리밥에 쌀 몇 톨 섞이거나, 밀가루 음식이었어요. 밀가루로 국수나 수제비하고 꽁다리 잘라서 공갈빵 만들어 먹고(웃음), 재래식 부엌에서 나무를 때야 하는데 학교 다녀오면 늘 산으로 나무하러 다녔어요. 2남 4녀 중 장남인데 위로 누님 두 분이 계시고, 아래로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가 있었어요. 너 나 할 것 없이 농사일을 도와야 했지요. 대구에서고등학교 다닐 때는 사촌형님 전셋집에서 더부살이를 했어요. 사촌누나가 아침 일찍 밥을 지어서 뒷바라지 해주셨지요. 참 고생 많으셨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가난했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던 김 센터장은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매일 학교까지 4km를 꼬박 걸어 다녔고, 변변한 가방도 없이 책보를 매고 뛰다가 도시락 국물이 쏟아져서 책을 버린 일 등 추억의 편린들을 쉬지 않고 끄집어냈다.

“산양중학교(3회) 3학년 때 처음 마을에 전깃불이 들어왔어요. 그 전에는 호롱불 아래서 졸다가 머리카락도 태웠는데 전깃불이 들어오니 별천지가 됐어요. 요즘도 마을 초등학교 행사에 종종 참가하는데 우리 때 1300명이던 인원이 지금은 전교생 30명으로 줄었어요. 중학교도 600여 명에 달했는데 지금은 27명뿐입니다. 시골 마을의 모습은 상전벽해나 다름없는데 나를 키워준 학교는 세월만큼 늙어버린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고향 문경의 산양중학교 동기들과 함께. 김 센터장에게 고향은 가난과 동심, 웃음이 섞인 기억의 만물상이다.
고향 문경의 산양중학교 동기들과 함께. 김 센터장에게 고향은 가난과 동심, 웃음이 섞인 기억의 만물상이다.

김 센터장은 자신의 롤모델로 사촌형님을 꼽았다. 안동교대를 나와 대구에서 교편을 잡고,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퇴직한 김정호씨(70세)다. 대학 동기들과 다른 길(교직)을 가슴에 품었던 것도 사촌형님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또 한명의 멘토 노석규 선생님이 계셨다.

“사촌형님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이 컸어요. 저를 대구에서 공부하도록 이끌어주신 분이기도 해요. 그리고 노석규 선생님과의 만남은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선물입니다. 안동교대를 나와서 첫 부임해서 우리를 맡으셨어요. 4학년과 5학년 연속으로 담임이 되셨어요. 그러니 우리 반 모두를 속속들이 다 아셨죠. 진로나 진학, 직업을 선택하는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늘 동기부여에 신경을 써 주셨고, 큰 인물이 되도록 꿈을 크게 키우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때 같은 반 친구들이 중앙일보 기자, 서울 강남구청 공무원 등 잘 성장했어요(웃음). 사회 생활하면서 고향에 갈 기회마다 동기들과 함께 자주 찾아뵈었죠. 5년 전 작고하시기 전에 양복도 맞춰드리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어요. 어느날 ‘선생 김봉두’라는 영화를 보는데 많이 생각납디다. 눈물이 울컥 터졌지요.”

교직에 대한 꿈만 품었던 그에게 운명은 또 한 번 슬그머니 청소년활동가의 길을 제시했다. 당시만 해도 봉사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였다. 선배 몇 명이 `도시 야학`을 하는데 도움을 요청하기에 몇 번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됐다. 방학 때마다 야학 봉사를 했다.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 사립 중등교사로 갈 기회가 있었어요. 하지만 300만 원이라는 돈이 필요했어요.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마침 대구시립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채용 소식이 있었어요. 1986년도인데 당시 장애인보지관은 전국에 3곳뿐이었어요. 서울 2곳, 대구 1곳이었죠. 대전은 1989년도에 생겼습니다. 첫 직장이 장애인복지의 씨앗을 심는 곳이었어요. 6년을 근무했어요. 이 무렵 청소년활동의 필요성과 역할에 대한 개념이 싹텄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막연했던 생각이 구체화되고, 일종의 사명감으로 체화된 시기였습니다.”

김 센터장은 대구시립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아내 박은순씨를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부인은 평생의 반려자이면서 청소년활동가의 길을 걷게 한 소중한 인연의 연결고리가 됐다.
김 센터장은 대구시립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아내 박은순씨를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부인은 평생의 반려자이면서 청소년활동가의 길을 걷게 한 소중한 인연의 연결고리가 됐다.

김 센터장이 본격적으로 청소년활동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대전’과의 인연에서 시작됐다. 대구장애인복지관에서 사내 커플로 결혼한 부인(박은순씨‧공주 법무부치료감호소 재활치료사)이 1990년에 공주로 직장을 옮기면서 운명적인 타향 생활과 청소년활동가의 삶이 시작됐다.

“충남대 김봉옥 전 병원장이 아내의 은사입니다. 그분의 권유로 아내가 직장을 옮겼어요. 또 도마동 중앙감리교회 허광필 부목사 부인과 집사람이 대학교 물리치료과 동창이예요. 1년 반 정도 주말부부를 하고 있는데 당시 대전대신고 이사장이면서 대전시의원을 하던 이기웅씨(작고)를 소개해 줬어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보좌관 역할을 하게됐어요. 2년 10개월 동안 의원 원고와 시정질문지 등을 작성하면서 법대 출신의 실력을 발휘했죠. 이때 경험이 나중에 큰 힘이 됐어요. 대전지역 공무원들을 많이 알게됐고, 현장 경험과 행정의 흐름을 알게 됐어요. 김진호 전 시의원하고는 20년 가까운 친분을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좌관의 길은 천직이 아니었다.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하고 싶은 일도 아니고, 좋아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던 1995년 연말, 사회복지사 한 명이 그를 찾아왔다. 대전시가 운영하는 청소년자원봉사센터에서 정보지원부장 자리를 공모하는데 한번 응모하면 어떻겠느냐는 권유였다.

“당시에는 대전평송수련원이 생기기 전이예요. 청소년센터는 (사)청소년교화연합회 대전지부가 위탁운영하고 있었어요. 중구 문화동에 있는 연화사 종실 주지스님이 센터장을 맡고 계셨죠. 이력서를 들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몇 사람이 응모했는데 한서대 안권순 교수(아동청소년학과)와 함께 나란히 교육개발부장과 정보지원부장으로 채용됐어요. 그로부터 청소년 업무만 꼬박 22년째입니다.”

'대전'은 김 센터장에게 제2의 고향이다. 꼬박 22년을 청소년업무를 해 온 직장도 '대전'이다. 사진은 중구 문화동 시절 사무실 모습이다.
'대전'은 김 센터장에게 제2의 고향이다. 꼬박 22년을 청소년업무를 해 온 직장도 '대전'이다. 사진은 중구 문화동 시절 사무실 모습이다.

몸에 딱 맞는 직업을 찾은 효과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빛났다. 다양한 청소년활동 중에서도 ‘봉사활동’을 가장 중요한 콘셉트로 삼았다. 학교 징계학생을 사회봉사를 통해 계도하는 프로그램을 전국에서 최초로 만들었고, ‘청사랑’이라는 청소년봉사활동 교육지도사 양성 사업도 전국 최초로 실시했다. 좋아하는 일에 동분서주 매진하는 사이 대전청소년활동진흥센터는 전국 청소년진흥사업의 롤모델이 됐다.

대전청소년자원봉사센터가 추진해 온 각종 청소년프로그램은 문화관광부장관상, 보건복지부장관상, 국가청소년위원회위원장상 등 수많은 단체 수상실적으로 이어졌고, 전국 청소년센터의 롤모델로 위상을 높였다.
대전청소년자원봉사센터가 추진해 온 각종 청소년프로그램은 문화관광부장관상, 보건복지부장관상, 국가청소년위원회위원장상 등 수많은 단체 수상실적으로 이어졌고, 전국 청소년센터의 롤모델로 위상을 높였다.

“사실 청소년활동이라는 게 1995년 김영삼 정부의 5.31교육개혁에서 출발한 겁니다. 당시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박한상 존속 살인사건, 김성복 교수 패륜 사건, 지존파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의 공통점이 지식이나 기술 부족이 아니라 도덕성 결핍에 따른 인재라고 판단한 거죠. 그래서 정부가 나선 겁니다. 5.31교육개혁을 통해 청소년들의 수련활동과 자원봉사활동을 강화하고,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 인성을 함양하는 교육을 이뤄내고자 했지요. 이런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우리 청소년활동진흥센터가 맡게 된 겁니다. 저는 봉사에서 의미를 찾아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청소년자원봉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데 노력한 거죠.”

김 센터장은 청소년봉사가 요즘 들어 많이 변질되고 있다는 아쉬움도 토로했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생각 속에는 봉사시간을 채우고, 학교생활기록부에 채워 넣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도 청소년자원봉사를 봉사학습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고, 학습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미국은 존 듀이가 경험을 통한 실용철학에서 제시한 커뮤니티스쿨을 근거해 1980년대부터 러닝 바이 두잉(learning by doing), 러닝 스루 익스피어리언스(learning through experience)를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는 점이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학생부 이력을 위한 봉사는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어요. 그나마 가족 봉사활동이 활성화되면서 가족 내부의 친밀감 형성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김 센터장이 아쉬워하는 것은 또 있다. 전국 청소년활동센터가 해 오던 해외봉사활동이 올해부터 폐지된 것이다. 정부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사업과 중복된다면서 없앴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논리입니다. 청소년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협력작업과 교육을 하면서 금새 친해집니다. 며칠만 함께 봉사활동을 나누면 끌어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게 청소년활동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 아닙니까? 10년 넘게 해오던 프로그램을 하루아침에 없앤다는 것은 참 애석한 일입니다.”

청소년활동가로 쉼 없이 달려온 김 센터장은 어느새 퇴임을 1년 앞두고 있다. 김 센터장은 후배들이 청소년들을 건전하게 만드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오래 업무를 해 줬으면 하는 소망을 밝혔다. 그러면서 청소년 사회봉사 명령 프로그램으로 만난 한 학생과의 일화를 전했다.

“1997년 9월이었어요. 패싸움을 하다가 배에 자상을 입은 고등학생이 사회봉사 징계를 받고 우리를 찾아왔어요.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였어요. 이 학생이 사회봉사프로그램을 이수한 뒤 남긴 수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잔디와 함께 자라나는 잡초를 뽑았습니다. 같이 자라는 똑같은 풀인데도 잡초는 뽑혀야만 했습니다. 저는 잔디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껏 저는 잡초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잡초는 뽑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잡초를 뽑으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지저분했던 잔디밭이 점점 더 깨끗해져가면서 제 마음도 점점 깨끗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이 학생의 수기는 김 센터장이 직접 제목을 단 책 ‘사랑으로 크는 청소년(특별교육대상 청소년지도교재)’에 수록돼 있다.

“어느 책에서 얻은 구절인데 우연에 관심을 두면 인연이 맺어지고, 인연에 노력을 더하면 필연이 된다고 합니다. 마치 저의 삶을 대변해 주는 말 같았습니다. 후배 직원들에게도 비범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이 쌓이고 쌓여서 비범이 된다는 말을 합니다. 평범한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기본에 충실하면 노하우가 생기고, 나중에는 지역사회를 견인하는 보람이 될 겁니다.“

김명수 센터장은 내년 6월 퇴임한다. 20여년을 청소년활동가의 외길을 걸어온 그는 허튼 인연이 없다고 말한다. 우연에 관심을 두면 인연이 되고, 인연에 노력을 더하면 필연이 되더라는 그의 말은 울림이 컸다.
김명수 센터장은 내년 6월 퇴임한다. 20여년을 청소년활동가의 외길을 걸어온 그는 허튼 인연이 없다고 말한다. 우연에 관심을 두면 인연이 되고, 인연에 노력을 더하면 필연이 되더라는 그의 말은 울림이 컸다.

김 센터장에게 대전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한마디를 부탁했다. 뜻밖에도 외아들 경태씨(26‧우송정보대 실용음악과 작곡 전공)를 향한 덕담이 돌아왔다.

“요즘 청소년들은 뭐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아이도 음악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좋아하는 일인데 앞으로 뭘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내놓지 못했어요. 하지만 막지 않았어요. 제가 청소년진흥 업무를 하는 사람인데 남의 자녀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식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식으로 반대하면 되겠어요? 지금도 제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달성하려는 노력이 뒤따릅니다. 우리 청소년들도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을 되도록 일찍 찾아내 꾸준히 갈고 닦았으면 합니다.”

김 센터장은 인터뷰 내내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였다. 외아들 경태씨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지지도 밝혔다.
김 센터장은 인터뷰 내내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였다. 외아들 경태씨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지지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