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 왜 홍성으로 지명을 바꿨나?
홍주, 왜 홍성으로 지명을 바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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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29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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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민준 학생기자(대전 성덕중2학년)

때는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의 한 지방의 이름이 어이없는 이유로 바뀌었다. 바로 '홍주(洪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이다. 홍주는 왜 이름이 바뀐 것일까?

조선 시대에 홍주는 충청남도의 목(牧)이나 부(府) 단위의 광역지자체였다. 당연히 대도시인 홍주에서 유교는 활발히 전개됐다. 문제는 조선 말, 일제가 강화도 늑약을 체결하면서부터다. '늑약'은 일종의 두 나라 사이의 조약인데 양측이 정당하게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닌, 또 양측의 정상이 만나지 않고,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다섯 명의 매국노들이 일본과 일방적으로 체결됐기 때문에 '굴레 늑(勒)' 자를 써서 늑약이라고 부른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무효를 외치고, 을사오적을 나라의 역적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시위가 발생한다. 그 중에서 홍주는 선비의 고장 충청도 중에서도 유난히 많은 애국지사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홍주의 남당리는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다르다"라는 인물성이론을 주창한 남당 한원진 선생이 활동했던 곳이고, 남당의 사상을 이어받은 많은 선비들과 우국지사들이 "조선과 왜는 다르다"며 강한 항일투쟁을 펼쳤다. 1905년, 일제 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홍주는 그 어떤 다른 지역보다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배출했다.

양곡사는 남당 한원진 선생의 사당이다. 그의 인물성이론은 조선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가에게 거대한 영향을 줬다.
양곡사는 남당 한원진 선생의 사당이다. 그의 인물성이론은 조선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가에게 거대한 영향을 줬다.

홍주에서 국내 다른 지역보다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들의 항일구국운동 가운데 제일 규모가 크고 치열했던 항전도 홍주읍성 전투(1906년)에서 펼쳐졌다. 1949년 수많은 의병들의 유해가 우연히 발견됐고, 합장하여 분묘를 조성한 것이 지금의 홍주의사총이다.

홍주의사총에는 이름 모를 수많은 홍성의 우국지사와 의병들이 묻혀있다.
홍주의사총에는 이름 모를 수많은 홍성의 우국지사와 의병들이 묻혀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백야 김좌진 장군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들이 속속 출현하자 일제는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막을 속셈으로 공주와 발음이 겹쳐 어렵고 헷갈린다는 이유로 홍주의 지명을 홍성으로 바꾼다.

이 사건에는 일제가 독립 운동가들과 의병들을 막기위해 땅의 이름까지 바꾼 아픈 역사가 숨어 있는 셈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던 조선 선비와 백성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없애야만 일제에 항거하는 정신을 말살할 수 있다는 일본인들의 심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일제는 1914년 군·면의 통폐합령을 선포하고, 홍주를 홍성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홍성군에는 홍주산성을 포함한 몇몇 문화재들만 '홍주'라는 옛이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홍성은 이름까지 뺏기는 수모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광복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했다. 우리는 홍주역사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홍성은 이름까지 뺏기는 수모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광복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했다. 우리는 홍주역사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한민국이 광복한 뒤 지금까지 홍성군은 줄기차게 지명을 홍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개칭신청을 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일제에 의해 바뀌었지만 광복 후에도 원래 대로 되돌리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오는 것들이 꽤 많다. 특히 지명을 바꿔 독립운동가들의 의지를 꺾고, 한민족을 지배하겠다는 일제의 야욕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고 화가 난다.

2018년 올해는 '홍주'라는 이름을 쓴지 10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홍성 주민들의 염원인 홍주 지명 되찾기와 홍주시(市) 승격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홍주읍성의 북문인 홍화문에서 치열했던 의병들의 나라사랑과 조선 선비들의 절개를 느꼈다.
홍주읍성의 북문인 홍화문에서 치열했던 의병들의 나라사랑과 조선 선비들의 절개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