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학창시절] 권선택 대전광역시장
[명사의 학창시절] 권선택 대전광역시장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7.11.2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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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학창시절'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귀감이 된다. 남다른 탄생과 고난과 시련, 이를 극복하는 비범한 능력, 그리고 사회적인 성공으로 이어지는 보편적인 서사구조 속에서 학창시절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감정이입된다.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정치인들의 학창시절이 궁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침 권선택 대전광역시장의 학창시절이 궁금했다.

시간을 거슬러 보자. 대전광역시장, 국회의원, 행정고시 최연소 전국 수석, 인(in)서울, 대전고, 충남중, 산서초, 목달동, 농부의 아들. 권선택 시장이 걸어 온 이력은 모든 학부모들이 바라 마지않는 ‘개천의 용’이었다.

권선택 시장을 만나 지난했던 학창시절과 치열했던 공부법을 들어봤다.

#모두가 배고픈 시절,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다.

권 시장이 나고 자란 곳은 대전 중구 목달동이다. 그는 늘 “내 고향 대전이 스스로에게 꿈을 줬다”고 말한다. 하지만 말이 대전 사람이지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목달동은 대전과는 동떨어진 이미지의 시골 촌락이다. 겨우 7-8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곳이다.

그의 유년기는 1960년대 농부의 자녀들이 누구나 겪었던 가난과 함께 했다. 3대가 함께 사는 농가에서 7남매 대가족의 생활은 늘 구차하고 궁색했다. 비록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지만 소년 권선택은 마음껏 꿈과 끼를 키워나갔다. 그 바탕에는 할머니(이의정 여사)의 글 읽는 소리가 있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배움의 기쁨을 알게 해줬어요. 늘 책을 가까이 하셨고, 천자문에서 사서삼경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으셨죠. 신여성은 아니었지만 도승지를 지낸 아버지를 둘 만큼 양가집 규수였어요. 네 살 무렵인 나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며 문리(文理)를 일깨워 주신 분도 할머니였습니다.”

목달동 바로 옆 무수동이 안동 권씨 집성촌이어서 자연스럽게 유가적(儒家的)인 집안 분위기도 그의 공부에 한몫했다. 그는 안동 권씨 36세손이고, 탄옹 권시 선생의 12세손이자 유회당 권진 선생의 10세손이다.

산서초등학교 은사님과 친구들과 함께.
산서초등학교 은사님과 친구들과 함께.

#하루라도 빨리 학교에 가고 싶었다.

소년 권선택은 키가 작았다. 그 시절엔 누구나 작았다고 회상하는 어르신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작았다. 그야말로 ‘땅꼬마’였다.

일곱 살이 되던 해, 꼬마의 마음은 두근반 세근반이 됐다. 학교에 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물론 너무 작았던 키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낙심하던 손자의 표정을 읽고,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입학 허가증을 받아낸 분도 할머니였다.

“키가 작은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오히려 키가 작으니까 한 해라도 더 빨리 공부를 시작해야 남들보다 앞서갈 수 있지 않느냐고 하셨답니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겠지요.(웃음)”

사연이 있으면 더 열심히 하는 법이다. 할머니 덕분에 꿈에 그리던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게 됐으니 선생님 말씀, 교과서 속 이야기, 친구들과 노는 일 등 모든 것이 재미있었다. 한 학년에 60명 남짓이었지만 교실 맨 앞줄에 앉은 권선택이 늘 1등을 도맡아 한 것은 당연했다.

“키가 작아서 앞에 앉는 아이가 아니라 키는 작아도 남의 앞에 서는 아이가 돼 있었어요.”

소년 권선택의 학창시절은 그렇게 시작됐다.

#인생은 선택이다. 선택이 미래를 바꾼다.

상급학년에 올라갈수록 ‘진로 선택’은 누구에게나 고민이다. 소년 권선택도 마찬가지였다. 시골 마을에서 1등었지만 중학교는 녹록치 않았다. 그 시절 최고의 명문이던 대전중학교에 도전했지만 낙방했다. 1년 동안 재수했지만 다시 도전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충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아마도 그 때 가장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죠. 시골마을에서는 공부를 제일 잘하는 줄 알았는데 도시로 나오니 별거 아니었어요.”

시련은 있었지만 좌절은 없었다. 충남중학교에 입학한 뒤 새롭게 결기를 다졌다. 당시만 해도 목달동에서 충남중학교까지 오가는 버스가 없어서 통학이 쉽지 않았다. 집을 떠나 친척집에서 하숙을 했다. 배고픔도 배우고, 외로움도 배웠지만 반에서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사실 소년 권선택의 고민은 배고픔도 외로움도 아니었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겼다. 당시 대전과 충청지역 최고 명문으로 꼽히던 대전고등학교 진학을 꿈꿨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대전에 있던 5년제 대전공업전문학교로 진학할 것을 고집했다.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또래 친구들의 눈썰매를 만들어주고, 환등기나 기타를 직접 만들고, 마을 수력 발전기까지 척척 수리하는 등 아들의 손재주는 기술자로서 더 큰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때 뜻하지 않는 구원투수가 등장한다. 바로 3학년 담임이던 정필복 선생님이다. 제자의 고민을 일찌감치 알았던 선생님은 부모님을 설득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선생님께서 선택이의 재주와 성적이 아깝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장차 적성에 맞는 더 훌륭한 길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등 아버지를 수도 없이 설득하셨답니다. 결국 아버지가 승낙하셨고, 대전고에 합격했지요.”

대전고에 입학해서도 진로 선택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이과를 선택했지만 왠지 모르게 역사, 정치, 사회 등에 마음이 끌렸다. 결국 2학년 시작과 동시에 문과로 전과했다.

“그 때는 망설이지 않았어요. 내 적성을 가장 잘 아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확신을 했고, 확신에 따라 진로를 선택했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가 질 생각이었습니다. 문과 공부를 해 본 결과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요.”

권 시장은 인생의 전환점마다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요즘에는 직장, 취업 등 눈앞의 트렌드에 맞춰 인생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잘 할 있고, 신나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인기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긴 줄에 서는 것과 같아요. 오히려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나는 공직에 진출할 때 일만 많고, 인기 없던 내무부의 지방 일선 행정기관 근무를 선택했습니다. 출세가 보장된 정책 부서는 대학교수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직(公職)은 반드시 주민들 속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과의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웠고, 대전시장이 될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성균관대 졸업식, 부모님과 함께
성균관대 졸업식, 부모님과 함께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소중한 멘토들.

권 시장에게는 정필복 선생님처럼 잊지 못할 멘토들이 등장한다. 대학 진학의 순간이나 직업 선택의 순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범대를 진학해 교사의 길을 걷기를 원했던 가족과 달리 서울 명문대학을 지원하고 싶었던 그를 도운 건 고종사촌형(이권호)이었다. 결국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2학년 겨울에 전공인 경영학과 대신 ‘행정고시’로 인생의 방향을 튼 것도 고시를 준비하던 선배들이라는 ‘멘토’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특히 선생님과의 일화가 많다.

“인생살이는 관계의 연속입니다. 어떤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인생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마이너스가 되기도 해요. 나는 선생님을 잘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은사이신 정종만 선생님은 아이들을 아주 많이 사랑해 주셨어요. 토끼몰이, 개구리잡기 등 들로 산으로 제자들과 함께 체험학습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동창들을 만나면 정종만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중학교 때는 영어담당 유명순 선생님을 만난 것이 참 고마운 인연입니다. 매일 시험을 보고 수업을 시작하는데 틀린 개수만큼 혼이 났어요. 덕분에 영어는 항상 100점을 받았습니다. 유명순 선생님의 가르침은 할머니께서 제게 훈육하셨던 기본적인 단어를 암기한 뒤 내용을 심화해 나가는 방식의 공부법이어서 금세 효과가 났지요.”

1992년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 시절.
1992년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 시절.

#행정고시 전국 수석, 권선택의 공부법

권 시장은 성균관대학 재학시절 행정고시를 패스했다. 그것도 전국 최연소 수석이다. 2학년 가을(1975년)에 고시 공부를 시작해서 1년 6개월 만에 이뤄냈다. 당연히 공부법에 눈길이 간다.

일단 권 시장의 공부는 ‘정독(精讀)’으로 시작한다. 글자와 낱말의 뜻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자세히 읽는 방법이다. 유년시절 할머니께 받은 영향이 컸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많이 쌓아두면서 읽는데 나는 기본서를 완전히 익힌 뒤에 심화해 나갔어요. 이것저것 읽으면 정리가 안 됩니다. 큰 줄기를 잡아놓고 작은 줄기를 챙기는 방식이죠. 하나를 완전히 습득하고, 그 토대 위에 심화된 내용이 담긴 책을 읽습니다. 또 톨스토이 등 세계 명작과 고전을 읽기를 권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텍스트는 많이 접하지만 정작 책은 읽지 않는 것 같아요. 주제와 등장인물 등을 시험 위주로 요약해서 읽는 게 제대로 공부가 될까요? 정독해서 책을 읽는 방법은 고시 공부할 때도 안성맞춤이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까지 할머니한테 한학을 배운 것도 영향을 줬지요. 모든 텍스트는 글이 기반이고, 글에 담긴 용어는 대개 한자어로 돼 있잖아요. 우리 안동 권씨들은 대개 ‘문리 튼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한자 공부가 개념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권 시장이 공부에 재미를 느낀 것은 ‘칭찬’과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예전 시골마을은 아이들도 농사일에 동원이 됐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책 읽어라, 공부하라”는 할머니의 말씀은 농사일에 열외 될 만큼 집안의 면학 분위기를 만들었다.

“할머니가 제일 기분 좋으시거나 자랑하실 때가, 손주들이 상장을 받아 오거나 시험에서 1등을 할 때였어요. 공부에서 성과를 내면 늘 아낌없이 칭찬해 주셨던 모습이 동기부여를 주셨지요.”

공부에는 하고자 하는 ‘욕구’가 제일 중요하다. 그가 고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서울대라는 전기대학에서 낙방했다는 허무함이 가장 컸다. 게다가 세상도 어수선했다. 대학 1학년을 허송세월했던 그에게 ‘고시’는 돌파구였다.

“한 선배가 고시는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살 맛 나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자신의 이익을 바라거나 출세를 하려고 하는 것 만은 아니고, 뭔가 새로운 길을 찾는 일이라구요. 그 길로 고시책을 사다가 공부를 시작했어요. 재정학, 회계학 같은 과목은 전공인 경영학하고도 연결되고, 행정법 같은 법률 과목도 재미있었어요. 이런 과목들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습니다.”

물론 곡절도 많았다. 당장 집에서 반대했다. 요즘말로 치면 수년 째 합격하지 못한 채로 고시에만 매달리는 ‘고시 낭인(浪人)’이 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결국 1년 반을 부모님 몰래 도전했다.

일단 마음을 굳힌 뒤에는 ‘몰입’이 최고의 공부법이었다. 전공과목인 경영학과 수업도 모두 빠졌다. 성균관대를 떠나 하숙집 근처인 국민대 도서관을 찾았다. 매일 도시락 2개를 싸서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고시책들과 씨름했다.

하지만 결과는 1차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준비기간이 워낙 짧은 탓이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들 몰래 고생하면서 준비했는데 하다못해 1차라도 합격하고 그만 두고 싶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실패 분석을 했고, 하루 4시간만 잤다. 법대를 드나들며 청강을 했다. 과락을 경험했던 노동법 등의 실력을 키웠다. 고난은 헛되지 않았다. 제20회 행정고시 합격자 55명 가운데 가장 꼭대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당시 시험에서 재정학 과목이 매우 어렵게 출제 됐는데 응시생 절반 정도가 포기하고 나갔어요. 문제가 ‘대한민국의 지방경제에 대해 구조적 모순점인가 개선방안’으로 상당히 포괄적인 내용이었어요. 결국 재정학에서 75점을 받아 전국 수석을 차지하게 됐지요.”

#권 시장의 자녀교육, “스스로 선택해라.”

권 시장의 자녀교육에서 ‘충고는 하되 강요는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자녀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다.

“집 사람(윤수의 여사)이 아이들 교육과 진로 문제로 많이 불평을 했어요.(웃음) 고시 공부를 장려하지는 못할망정 괜히 어렵다는 둥 선입견을 줘서 도전할 기회까지 빼앗았다는 거죠. 하지만 자녀 교육은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그는 대전의 20만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책 한 권을 권했다. 건명원의 초대 원장인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쓴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다. 2015년 건명원에서 진행한 다섯 차례의 철학 강의를 묶은 책이다. 책은 나라를 이끌어갈 개인을 각성시키고, 함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혁명가이자 문명의 깃발로서의 역할을 자처하며 인문적, 지성적, 문화적, 예술적 차원으로의 선진화를 철학을 통해 제시한다.

“항상 ‘사고는 긍정적, 행동은 적극적’이라는 좌우명을 새기면서 살아왔어요. 긍정적으로 사는 게 싶지 않죠. 그러나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면 어려운 상황일 때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돼요. 우리 청소년들이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때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꿈과 끼를 펼쳐나가길 기원합니다.”